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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도피책' 박수경에 떠밀려난 '세월호 참사'
2014-07-29 19:03:05 2014-07-29 19:07:35
2007년 11월16일 오후 7시50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싸늘한 밤기운을 가르며 달려 온 승합차가 포토라인에 서고 40대 초반의 한 남자가 내렸다. 올백으로 말쑥하게 넘긴 머리에 흰 얼굴, 쥐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누가 봐도 눈을 끄는 세련된 용모였다. 
 
수십대의 카메라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30초간 젠틀한 미소로 촬영에 응한 그는 청사로 들어가면서 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와우(Wow)". 운집한 취재진을 보고 그는 세련된 미국식 탄사를 나지막하게 외쳤다. 플래시가 또 작렬했다.
  
TV 생중계를 통해 이 광경이 방송된 뒤 인터넷상에서는 "딱 내 스타일"이라는 여성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이 남자는 검찰 조사를 받은 뒤 곧바로 구속됐다.
  
2007년 대선의 핵으로, ‘BBK사건’의 당사자인 김경준씨는 그렇게 유명세를 치르며 재판에 넘겨졌다. 혐의는 횡령, 자금세탁, 공문서 위조. 대법원은 2009년 5월 징역 8년에 벌금 100억원의 형을 확정했다. 김씨는 지금도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기소된 뒤 미모의 미국변호사인 그의 누나 에리카 김씨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염문설이 세간에 나돌면서 김씨는 또 한번 유명세를 탔다.
 
그 바람에 결국 김씨가 범죄에 이용한 벤처기업 BBK의 실소유주가 이 전 대통령이었는지는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 전 대통령은 그해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5년간 절대 권세를 누렸고 우리는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2014년 7월25일 오후 9시15분. 석달 동안 도주해 온 유대균씨(43)와 도피책 박수경(34·여)씨가 검거돼 검찰 포토라인 앞에 섰다. 주연은 유씨였지만 박씨는 씬 스틸러(Scene Stealer)였다. 
 
미인형 얼굴에 훤칠한 외모도 그랬지만 당당하고도 단호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에 여론은 빨려들었다. 태권도 고단자로 국제심판 자격까지 갖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은 더 들끓었다. 심지어 SNS상에는 팬클럽까지 등장했다. 박씨는 유씨와 함께 지난 28일 구속됐지만 팬클럽 규모는 더 늘어 개설 당일 10여명에서 지금은 130여명까지 늘었다.
  
구속된 뒤의 이야기지만 박씨가 그같이 당당했던 것은 종교적 신념이나 무도인의 기개가 아니었다. 검거돼 검사 앞에 앉았을 때 그는 주저앉아 펑펑 운 것으로 전해졌다. 카메라 앞의 그 모습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정면만 바라본 것이었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의 등장으로 온갖 음모론과 추측이 난무했던 유병언 회장의 변사체 발견 사건은 금방 희석됐다. 여론은 유씨와 박씨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졌다. 두 사람의 사이는 과장과 억측이 더해져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뒤늦게 언론이 까발린 박씨의 이혼소송 이야기가 기름을 부었다.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은 이미 관심에서 밀려났다. 
 
그와 같은 시기에 수원지법에서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했다. 가림막이나 영상을 통한 진술도 가능했지만 학생들은 직접 법정에 섰다.
 
트라우마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을 학생들은 다시 예전의 생지옥을 떠올리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선원들은 이미 없었고 도착한 해경은 바라만 보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친구들끼리 구명조끼를 내어 주고 탈출을 도왔다며 해경과 선원들을 엄벌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하나같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고 법정 증언에서 강조했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이를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피해학생들과 유족 뿐이다. 
 
여권에서는 참사를 교통사고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에 이어 같은 당 홍문종 의원의 발언은 저의를 의심케 한다. 그는 29일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면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천안함 희생장병들은 나라를 지키다가 순국했으니 세월호 희생자들을 그와 같이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홍 의원 말대로 천안함 희생 장병들은 순국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은 나라가 제 기능을 못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어찌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우리 국민이 잔가지에 집착하면서 본령을 망각하는 수많은 우를 범할 때마다 결과는 가혹했다. 제대로 뽑아내어 바로잡지 못한 비뚤어진 본령은 얼굴만 바꿔가면서 우리를 기망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또한 그의 연속이다. 
 
다 놓아줘야 한다. 박씨도 변사체로 부관참시를 당한 유 회장도, 도망치느라 아버지의 죽음도 몰랐던 유씨도 모두 우리 관심 밖으로 놓아줘야 한다. 어차피 그들은 깃털일 뿐이다.
 
검찰이 유 회장 일가와 세월호 참사를 서로 잇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지만 처음부터 법이론적 실험에 불과했다. 유 회장 변사체 주변의 구더기를 잡아 껍질을 벗겨내 유 회장의 사망시간을, 그것도 추정하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제는 본령을, 몸통을 제대로 뽑아내어 조사하고 고쳐야 한다. 다시 확인하건대 이번 사건의 본령은 오작동한 국가기능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해경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물에 잠길 때 보고서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한 안행부, 스스로 컨트롤타워이기를 부인한 청와대의 기능을 샅샅이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들어내어 수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는 단원고 생존 학생들과 희생자 유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국가와 국회의 기능이다. 세월호 특별법이 조속히 통과되어야 함은 이런 이유에서다. 당리당략을 떠난 초당적인 국회의 결단을 촉구한다.
 
최기철 정치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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