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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부호들)19.류융싱, '사료王'이 된 용감한 형제들
류씨 사형제, 철밥통 버리고 일제히 사표..공동 창업 나서
양계업으로 기반 마련 후 사료 산업에 본격 투신
1995년 둥팡시황그룹으로 독립..2008년 중국 최대 부호 올라
2014-05-26 10:00:00 2014-05-26 10:00:00
◇류융싱 둥팡시왕그룹 회장(사진=둥팡시왕그룹 홈페이지)
[뉴스토마토 김진양기자]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 영화 <친구> 중에서.
 
인생 여정 중 우리는 끊임없이 도전의 순간에 직면합니다. 그 때마다 어려운 선택을 함께해 줄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만약 그 동지가 피를 나눈 가족이라면 용기는 배가 될 것입니다.
 
중국의 성공한 기업가 명단에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류융싱(劉永行) 둥팡시왕(東方希望)그룹 회장도 3명의 용감한 형제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가 완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류씨 집안 사형제 중 둘째인 류융싱 회장은 평범한 시골 공무원이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교사, 국영기업 직원 등 이른바 '철밥통'을 끌어안고 사는 소시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류씨 형제들은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원탁회의를 갖습니다. 삼일 밤낮을 고심하고 토론한 끝에 "우리도 사업으로 큰 돈 좀 벌어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열풍이 쓰촨성의 시골 마을까지 불어닥친 1982년의 일입니다.
 
그날부터 류씨 형제들은 단칼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인 사업 구상도 없이 오로지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손목시계, 자전거 등을 팔았고 1000위안(약 17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양계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농민이 8억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도시보다 익숙한 농촌은 기회를 모색하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 초짜들에게 시행착오는 피해갈 수 없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계란을 부화시켜 영계를 내다파는 일이었는데, 처음으로 출하하던 날 2만마리의 닭을 어이없이 잃었습니다. 운송 과정에서 절반이 압사하고 나머지 절반은 불이 나 타 죽은 것입니다.
 
자칫했다가는 돈 한 푼 쥐어보지도 못하고 닭 10만마리를 모두 날릴 상황이 되자 류씨 형제들은 번거롭지만 부지런해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닭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손수 대나무 닭장을 만들었고, 새벽 4시부터 3시간 거리의 시장으로 직접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하루 일과는 닭을 모두 판 후에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십여일을 고생한 덕분에 재고는 모두 처분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이 얼마나 고됐던지 몸무게도 10kg 가까이 빠졌습니다.
 
닭으로 재미를 본 류씨 형제는 단가가 조금 더 높은 메추리로 눈을 돌렸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익을 남기기 위해 비용 절감에 주력했고 사업 규모는 1000만위안까지 늘어났습니다.
 
메추리 사업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류씨 형제는 곧 한계성을 발견합니다. 메추리가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한들 중국인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돼지고기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양돈이 아닌 사료에 주목했습니다. 돼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최소 1년이 걸리는 방식을 선진화해야 함을 간파했고, 그를 위해서는 풀이나 보리, 고구마 같은 1차적 식품이 아닌 전문 사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마침 외국의 사료 기업들이 중국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류씨 형제들의 예상대로 사료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류씨 형제들은 사료 전문 연구기관인 시왕(希望)과학연구소를 만들어 국내외 전문가를 초빙해 사료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2년 간의 연구 끝에 출시된 '시왕' 사료는 당시 가장 인기있던 태국산 사료와 품질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저렴한 강점을 가졌습니다. 순식간에 수 억위안대로 매출이 급증하고 업계를 평정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는 결과입니다.
 
류씨 형제가 사업을 시작한 지 14년째인 1995년, 이들은 독립 경영을 선언합니다. 4명의 형제가 함께 일군 시왕그룹이 중국 최대 민영 그룹으로 성장함에 따라 함께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류융싱 회장은 13개의 회사를 갖고 둥팡시왕그룹이란 이름으로 독립을 했습니다. 4년 후에는 본사도 쓰촨성 청두에서 상하이로 옮겼습니다.
 
개별 회사를 운영하게 된 이후에도 류융싱 회장은 사료 산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소신있는 경영을 했습니다. 부동산 광풍이 불어 너나할 것 없이 부동산 투자에 나설 때도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며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료 산업의 경쟁이 치열해져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해졌을때 고급 사료 개발과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서거나 사료 생산과 연계성이 있는 전기분해 알루미늄으로 사업 분야를 다각화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는 '농민을 부유하게 만들고 시민을 만족시키며 정부를 안심시키는' 원칙을 중시했습니다.
 
질 좋고 저렴한 사료를 제공하는 동시에 사료의 재료가되는 농부산물을 적정 가격에 매입해 농민과의 상생을 추구하고 일반 소비자에게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육고기를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세금 탈루 없는 정직한 기업 활동으로 국가 경제에도 이바지 하겠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류융싱 회장은 지난 2008년 포브스가 선정하는 중국 최대 부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지난해에는 이 순위가 10위까지 밀려나기는 했지만 쓰촨성 출신 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상위권에 랭크됐습니다. 
 
함께 했을 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함을, 혼자일 때는 흔들리지 않는 주관을 보여준 류융싱 회장. 류씨 사형제 중에서도 유독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는 이유가 이곳에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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