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프억빈=뉴스토마토 신다인 기자]
올해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프억빈 마을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베트남전은 한미동맹 강화와 경제성장 특수의 역사로만 기억된 탓에 전쟁의 이면인 민간인 피해는 오랫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뉴스토마토>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60주년을 맞아 현지를 찾아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그날의 기억을 들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군 기록, 현재 진행 중인 법적·사회적 논의를 함께 살펴보며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해야 할 질문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1966년 11월9일,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프억빈 마을 민간인 학살의 피해 생존자 보티리엠씨가 6월13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자택에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추웠던 기억이 나요. 어머니가 시장에서 동생이 입을 두꺼운 옷을 샀었는데…동생은 그 옷을 얼마 입지도 못하고 죽었죠."
베트남전 당시 프억빈 마을 학살 생존자인 보티리엠씨는 60년 전인 1966년 11월9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말을 이어가면서도 이따금 오른쪽 이마를 손으로 쓸어내렸습니다.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 파편이 아직도 박혀 있는 자리입니다.
당시 7세였던 리엠씨는 수류탄 파편에 오른쪽 이마와 다리를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건 운이 좋은 경우였습니다. 그날 가족 5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한 살배기 동생도 그날 한국군의 총격에 숨졌습니다.
비극은 리엠씨의 일만이 아닙니다.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 마을에서는 지금도 매년 11월9일이면 집집마다 제를 올립니다. 누군가에겐 어머니의 기일, 다른 이에겐 동생들의 기일, 또 다른 누군가에겐 한 집안이 통째로 사라진 날인 겁니다.
그날의 학살로 숨진 주민은 총 73명입니다. 한국군이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수류탄을 던졌던 프억빈 초등학교 한편엔 현재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약 3m에 달하는 위령비엔 희생자들의 이름과 출생연도가 빼곡히 새겨졌습니다. 이 가운데 32명은 피지도 못한 13세 이하의 어린아이였습니다.
6월13일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 학살 위령비 전경. 1966년 11월9일 프억빈 마을에서 한국군이 민간인 73명을 학살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노인, 여성, 아이였다. (사진=뉴스토마토)
32만명 파병한 베트남전…경제성장 특수 뒤에 가려진 이면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약 32만명을 베트남전에 파병했습니다. 베트남전은 오랫동안 '한미동맹 강화'와 '경제성장 특수'라는 국가적 성과로만 기억돼 왔습니다. 그 이면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오랫동안 공론장에 나오지 못한 채 대중의 기억 속에서 망각됐습니다. 세기가 바뀐 2000년대 들어서야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과 시민사회의 조사로 실상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80여건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 가운데 퐁니와 하미 마을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책임 인정과 사과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그러나 학살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 이들만이 아닙니다. 참혹한 학살을 겪고 살아남은 희생자들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뉴스토마토>가 만난 프억빈 마을 생존자 팜티프엉씨와 보티리엠씨는 1966년 11월9일 오전 9시 마을에 울려 퍼진 총소리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9시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을 먹는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팜티프엉)
"아침밥을 먹는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밥그릇을 내팽개치고 방공호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보티리엠)
아침 9시의 총성…마을 사람들 모아 놓고 수류탄 던진 군인
총성이 울리자 한국군을 피하라는 경고가 내려졌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숨느라 바빴습니다. 집 앞 흙 방공호, 들이닥친 한국군, 수류탄과 총격, 그리고 불길. 팜티프엉씨와 보티리엠씨가 공통적으로 진술하는 그날의 기억입니다.
"한국군이 방공호에서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죠. 가족들이 줄을 지어 나가는데, 마지막으로 나가던 내 머리채를 한국군이 거칠게 잡아챘습니다." 리엠씨는 아주 잠깐 군인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 찰나에 리엠씨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탕! 탕! 탕!' 도망치는 리엠씨의 등 뒤에서 귀를 찢는 총성이 연달아 울렸습니다.
리엠씨가 도망치면서 본 마을은 이미 불바다였습니다. '펑! 펑!' 마을 곳곳에서 대나무와 볏짚으로 지은 초가집들이 터지며 굉음을 냈습니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곳에 모아놓고는 수류탄을 던졌어요." 그때 터진 수류탄 파편이 리엠씨의 오른쪽 이마와 다리에 깊숙이 박혔습니다.
그는 얼굴을 타고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른 채, 외삼촌 집 외양간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총성과 비명을 들으며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어서야 마을로 돌아온 아버지가 외양간에 숨어 있던 리엠씨를 발견했습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딸을 업은 채, 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이 모두 총에 맞아 숨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군에 자원입대했으나, 2년 뒤 전쟁터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쟁고아가 된 리엠씨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간신히 자랐습니다.
"남의 집 아기를 돌보거나 소를 몰면서 구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맞을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한국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 군인이 왜 제 머리채를 잡았다가 놓아줬는지, 일부러 살려준 것인지…아직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 꼭 만나 물어보고 싶습니다."
프억빈 마을 민간인 학살의 피해 생존자 팜티프엉씨가 6월13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자택에서 1966년 11월9일을 회상하고 있다. 오른 손목에는 수류탄 파편으로 다친 상처가 남아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비시! 비시!" 소리친 군인들…'베트콩 아니다' 했지만 폭행
다른 생존자 팜티프엉씨가 기억하는 그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18세였던 프엉씨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흙으로 만든 방공호로 몸을 웅크렸습니다. 가족, 이웃 주민 10명과 함께였습니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철모를 쓴 한국군 4명이 방공호 앞에 나타나 손짓을 하며 소리쳤습니다. "비시! 비시!(VC·베트콩)"
주민들이 베트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나둘 방공호 밖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군은 프엉씨의 아버지를 보더니 무차별로 얼굴을 폭행했습니다. 공포에 질린 아버지가 마당으로 도망치자 등을 향해 조준 사격했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이어 군인들은 방공호 안으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던 프엉씨의 오른쪽 다리와 오른손엔 날카로운 파편들이 박혔습니다. 잠시 뒤 한국군은 집마다 불을 질렀고, 프엉씨는 눈앞에서 이웃 주민 3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용안작전 경과요도 1단계. 작전 경로 중 좌상단에 위치한 '33'번 표시는 프억빈 마을을 가리킨다. (사진=한베평화재단)
군 기록엔 '베트콩 사살'…현지 생존자 기억엔 '민간인 학살'
이들이 기억하는 1966년 11월 9일은 한국군의 '용안작전(龍眼作戰)'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는 1966년 11월 9일부터 27일까지 청룡여단 제2·3·1대대가 순서대로 꽝응아이성 선띤현 일대에서 수행한 베트콩 수색·소탕 작전입니다.
한국군이 이날 프억빈 마을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군 공식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국방부가 1979년 발간한 <파월한국군전사>에는 청룡여단이 프억빈(국방부 문서엔 'Phuong Dinh'으로 표기)을 '목표 33'으로 지칭하며, 이동하는 과정이 짧게 기록돼 있습니다.
책에는 "첨병과 VC(베트콩)가 지척 거리를 두고 마주쳤다. 이에 첨병은 선제 사격을 가하여 3명의 유기 시체를 내게 하였다"라며 "병기 수리소로 추정되는 2개소에서 부비트랩 뇌관과 장약 약간을 폭파한 연후에, 목표 33을 경유하여 △22로 진출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 어디에도 민간인 피해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과 베트남 당국의 기억은 전혀 다릅니다. 꽝응아이성은 한국군이 휩쓸고 간 프억빈 학살 현장을 문화재로 지정했고, 고증을 거쳐 2013년 위령비를 대대적으로 개보수했습니다. 과거 잘못 기록됐던 학살 날짜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1966년 11월9일'로 바로잡혔고, 위령비 전면엔 잔혹하게 희생된 노인과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73명의 명단이 뚜렷하게 새겨졌습니다.
베트남전 프억빈 마을 민간인 학살 생존자인 보티리엠씨는 "잠들기 전마다 생각한다. 나에게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어야 했는지"라며 "그 이유를 알고 정말 알고 싶다"고 했다. (사진=뉴스토마토)
생존자들 "한국 정부가 잘못 인정하고 사과하면 용서할 것"
프엉씨와 리엠씨는 지난 2019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1명과 뜻을 모아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동 청원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에 관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벌이는 한편 공식 입장을 표명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이행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국방부가 보유한 한국군 전투 사료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라고만 답했습니다.
이런 한국 정부의 차가운 태도를 알면서도 프엉씨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단호했습니다. "있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요. 백 번이고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요.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나는 기꺼이 용서하겠습니다."
현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프억빈 마을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60년째 품어온 질문에, 한국 정부는 이제라도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리엠씨는 매일 밤 자기 전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어야 했는지…그 이유를 정말 알고 싶습니다."
베트남 프억빈=신다인 기자 shin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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