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이끈 메모리 수요로 K반도체가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은 가운데, 메모리 반도체가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반복해 온 만큼 호황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의 규제가 역설적으로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가속화한 현실은, 지금의 슈퍼사이클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서늘한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산업의 쌀’ 반도체를 두고 중국이 벌이는 굴기의 현장과, 그 ‘자강’의 배경, K반도체의 생존 전략을 세 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_편집자
[뉴스토마토 안정훈·이명신 기자] #1. 2022년. 미국은 중국의 10나노 이하 첨단 공정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14나노 이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제조 장비의 대중 수출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중국 대표 정보기술(IT) 기업 화웨이는 7나노 공정 기반의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탑재된 ‘메이트 60 프로’를 공개했습니다. 중국 파운드리 업체 중신궈지(SMIC)가 구형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를 활용해, 미국의 규제를 우회하고 7나노 칩 구현에 성공한 것입니다.
지난 3월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2026 세미콘 차이나’에서 중 반도체 기업들은 반도체 자급률 80% 달성을 선언했다. (사진=연합뉴스)
#2. 중국의 ‘엔비디아’로 불리는 캠브리콘의 지난해 매출은 64억9700만위안(약 1조3900억원). 전년 대비 453.21%나 매출액이 늘면서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습니다. 2016년 설립한 중국 AI 칩 제조사 캠브리콘은 초기 화웨이가 자체 AI 칩 ‘어센드’를 제작하고, 엔비디아의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AI 칩 판로가 막힌 상황에서 미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제재가 시작됐고 이는 트럼프 행정부로 이어졌습니다. 위기가 가중될 것으로 대중 봉쇄는 캠브리콘에게 되레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중국 AI 기업들이 자국 내에서 AI 칩을 찾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수혜를 입은 까닭입니다.
중국 기업들 상당수는 2020년대 들어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부 지원과 함께 거대한 내수시장에서 서로를 고객사로 삼는 방식의 자구책이 성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장비 반입 규제로 첨단 공정 도입이 불가능진 중국은, ‘목을 조르는(차보즈)’ 압박 속에서도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점진적으로 기술력과 실적을 끌어올리면서 첨단 공정에서 한국에 뒤쳐졌다는 평가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습니다.
2023년 중 반도체 자급률 23%
10여년 전만 해도 중국은 반도체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처지였습니다. 특히 2013년에는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이 원유 수입액을 앞지르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반도체가 무역수지의 발목을 붙잡자, 중국 정부는 2014년 국가 직접회로 산업 발전 추진 요강, 이른바 ‘빅 펀드’를 발표하고 반도체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섰습니다.
중국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부상은 이 시기와 맞물립니다.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2016년 설립돼 중국 대표 메모리 기업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시기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적극적으로 견제했습니다. 2022년 당시 바이든 정부는 첨단 AI 칩과 자국 기술이 들어간 장비의 대중 수출을 규제하면서 중국을 겨냥한 직접 제재에 나섰습니다. 중국의 성장 동력 자체를 차단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지난 2024년 11월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페루 리마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수출 규제는 중국 반도체 시장에 직격타로 작용했습니다. 화웨이·SMIC·YMTC 등 대표 기업들이 수출 통제 명단(Entity List)에 이름을 올렸고 장비 수급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미국의 규제가 시행된 2023년 당시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23.0%로, ‘2025년까지 70%’라는 당초 목표에 크게 못 미친 상황이었습니다.
미 싱크탱크도 인정한 반도체 '자립'
다급해진 중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기업 지원에 나섰습니다. 중앙·지방정부가 모두 나서 부지와 세제 혜택, 전력 등 인프라를 제공하며 생산라인 가동과 연구개발을 지원했습니다. 실제 미 제재로 첨단 장비 반입이 지연되면서 DDR5 개발에 차질을 겪은 중국 대표 D램 제조사 CXMT는, 안후이성 허페이시 등 지방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17나노급 공정에서 DDR5와 LPDDR5X 메모리를 양산하는 단계까지 성장했습니다. 물론 DDR5에 16나노급 공정이 적용돼 경쟁사 대비 2~3년가량 뒤처진 수준이지만, 제재 속에서도 기술 개발과 양산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꼽힙니다.
대륙의 거대한 내수시장도 성장의 거름이 됐습니다. 나우라와 AMEC 등이 식각 장비를 자국 기업에 납품하기 시작했고, 캠브리콘과 무어스레드, 메타엑스, 비렌 테크놀로지 등이 GPU를 제작하며 몸집을 키웠습니다.
미국 싱크탱크 CSIS는 지난 3월 보고서를 통해 “초기 통제는 AI 모델 학습 및 운영에 사용되는 첨단 로직 칩과 이 칩을 제조하는 반도체 제조 장비(SME)의 이전을 제한”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통제는 설계 및 SME 범주로 확대됐다”고 짚었습니다. 이어 “이러한 통제는 중국이 최첨단 칩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지만, 국산 장비와 제품의 도입을 가속화해 반도체 설계 및 제조의 국산화를 위한 정부와 산업계의 공동 노력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다”며 미국의 제재가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촉진시켰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지난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반도체 기술 박람회 ‘세미콘 차이나’에 방문한 관람객들이 전시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중 제재에 피해 본 미 빅테크들
바이든·트럼프 정부의 연이은 제재를 맞은 중국 기업들은 최근 내수를 중심으로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1일 외신에 따르면 중국 대표 기업인 화웨이는 올해 AI 칩 매출이 120억달러(약 17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됩니다. 바이트댄스, 알리바바 등 화웨이의 AI 칩 ‘어센드 950PR’를 찾는 중국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실적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팹리스, 장비사 등 협력사들도 수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반도체 증착·식각 장비사인 나우라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 순위(매출 기준)가 2022년 8위에서 지난해 5위로 뛰어올랐습니다. ‘중국판 램리서치’로 불리는 AMEC는 2021년 31억813만위안(약 6616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123억8464만위안(약 2조6364억원)까지 급증했습니다.
반면 대중 제재로 수출길이 막힌 미국내 빅테크들이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번스타인은 엔비디아의 중국 AI 그래픽처리장치(GPU) 점유율이 2024년 66%에서 향후 8%까지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특별경쟁연구프로젝트(SCSP)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에서의 (엔비디아 AI 가속기) 점유율은 이제 0%”라고 했습니다.
봉쇄의 역설이 만든 중국 반도체의 성장세에 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이종환 상명대학교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중국은 국가 특성상 정부가 원하는 대로 정책을 이끌 수가 있다. 원하는 것들을 컨트롤하고 유도할 수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투자를 이어가면서, 그게 지금에 이르러 결실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편에서는 중국의 정책적 지원과 인재 양성, 관·산·학의 협력이 반도체 자립으로 이어졌는지를 조명합니다.
안정훈·이명신 기자 ajh760631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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