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나 질병으로 척수가 손상되어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정지 상태와 달리, 그들의 뇌는 여전히 끊임없이 “움직이라”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지난주 미국물리학협회(AIP)의 <APL 바이오엔지니어링(APL Bioengineering)>에 발표된 이탈리아와 스위스 연구진의 성과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뇌의 외침’을 포착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특히 이번 연구는 위험한 뇌 수술 없이, 뇌파(EEG)와 척수 자극기(SCS)를 연결해 마비된 신체를 다시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비 후에도 뇌는 여전히 움직이려 시도하며, 뇌파가 마비 환자의 움직임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미지=챗GPT 생성)
끊어진 다리, 살아있는 신호
척수 손상 환자의 경우, 대개 팔다리의 근육과 신경 자체는 건강합니다. 단지 뇌의 명령을 전달하는 고속도로인 척수가 중간에 끊겨 신호가 도달하지 못할 뿐입니다. 연구진은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환자가 마비된 다리를 움직이려 노력할 때 발생하는 뇌의 전기적 신호를 뇌파(EEG) 헤드셋으로 포착하고, 인공지능(AI)으로 해석한 뒤, 끊어진 척수 아래쪽 신경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기존에도 생각만으로 로봇 팔을 움직이는 기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처럼 두개골을 열고 뇌에 전극을 심어야 했습니다. 이번 이 연구의 제1저자인 로라 토니(Laura Toni) 박사는 “뇌 임플란트는 감염 위험이 있고, 환자에게 또 다른 수술이라는 큰 부담을 준다”며 “우리는 수영 모자처럼 쓰는 EEG 캡만으로 안전하게 신호를 읽어내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한계는 있습니다. 뇌의 구조상 팔을 움직이는 신호는 뇌 표면에서 잘 잡히지만, 다리를 움직이는 신호는 뇌 깊은 곳(중심부)에서 나오기 때문에 피부 밖에서 정밀하게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머신러닝 기술로 보완해 환자가 ‘움직이려 하는 순간’을 감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것은 “뇌파로 읽어낸 생각이 어떻게 실제 다리의 움직임으로 바뀌는가?”입니다. 그 해답은 이번 연구의 또 다른 주인공인 ‘척수 자극기(Spinal Cord Stimulator, SCS)’에 있습니다. 원래 척수 자극기는 만성 통증 환자를 위해 개발된 의료 기기입니다. 척수에 미세한 전기 흘려보내 통증 신호가 뇌로 전달되는 것을 방해하는 원리로, 일종의 '통증 차단기'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의공학자들은 이 기기가 단순한 차단기를 넘어, 끊어진 신경을 다시 잇는 ‘디지털 가교’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라 할지라도, 손상 부위 아래쪽의 신경 회로(요추 부위)는 대부분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단지 뇌에서 내려오는 ‘시동 명령’이 끊겨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척수 자극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점프 케이블' 역할을 수행합니다. 작동 원리는 ‘신호의 포착-명령의 전달-신경의 점화’ 등 3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환자가 "걷고 싶다"고 생각하면 뇌파(EEG) 캡이 그 의도를 감지해 디지털 신호로 변환합니다. 이렇게 변환된 신호는 무선으로 척수 자극기에 전달됩니다. 전달받은 신호에 따라 자극기는 척수 신경에 특정 패턴의 전기 펄스를 쏘아 보냅니다. 이 전기 자극은 뇌의 자연적인 명령을 모사해 잠들어 있던 신경 회로를 강제로 활성화합니다. 결과적으로 뇌의 신호가 끊긴 상태에서도 다리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하며, 환자는 실제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2023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기술 박람회 중 한 참석자가 뇌파를 이용해 정신건강 치료를 제공하는 iSync Wave EEG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뇌파 캡과 척수 자극기 결합
연구진은 “뇌파 캡이 ‘사령관’이라면 척수 자극기는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하는 ‘행동대장’으로 볼 수 있다”며 “이 두 기술의 정교한 결합이 비침습적 재활 치료의 핵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기술은 환자가 '움직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감지해 척수 자극기를 켜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걷기, 계단 오르기, 서 있기 같은 복잡한 동작을 구분해 내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연구진은 “앞으로 알고리즘을 고도화해 뇌파만으로 구체적인 동작 의도까지 파악해, 척수 자극기가 상황에 맞는 정교한 전기 자극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비록 초기 단계의 연구지만, 수술 없이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다시 걷을 수 있는 재활 치료의 혁신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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