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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 그놈이 턱밑까지 왔다
2020-12-29 06:00:00 2020-12-29 06:00:00
성탄절 전야제, 연신 창밖 밤하늘을 쳐다보던 딸아이는 평소와 달리 이른 잠자리에 든다. 산타할아버지가 새벽에 오시길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은 보통 때와 다른 행보다. 울보에 스스로 밥도 안 먹는 ‘미운 5세’가 이날만큼은 ‘착한 5세 코스프레’로 너스레를 떠니 아빠 미소가 절로 나왔다. 하루 신규 확진자가 천여 명을 오고가는 담장사이로 아장걸음이 향한 이부자리. 이른 육퇴(육아퇴근)의 맛은 소소했고 평온했다.
 
사실 창밖을 연신 쳐다보게 한 딸아이의 심려는 나의 동심파괴성 어조 때문이다. 기저질환과 고령인 산타 할아버지의 방문이 올해는 코로나 탓에 힘들 것이라며 약을 올렸다.
 
‘아차’ 싶을 정도로 아이를 놀린 대가는 글썽이는 눈물과 순간의 눈총이었다. 뜻하지 않게 아이를 달랜 건 세계보건기구(WHO)의 코로나19 현장조사 책임자인 마리아 밴커코브 박사의 발언이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코로나를 피해 올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그래도 산타는 온다’는 그의 훈훈한 언담은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의 관심사였다. 늦장 팬더믹 선언 등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난해온 ‘최악의 WHO’에 난 비로소 잔잔한 박수를 보냈다.
 
육퇴의 맛으로 밀러들던 숙취가 사그라질 새도 없던 성탄절 아침, 아이의 돌고래성 초음파 소리에 부스스 잠을 깼다. 아이는 몸뚱이만한 산타의 선물을 들고 홍조를 띤 표정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에 상기됐을까. 놀이터를 가자는 조름에 주섬주섬 옷을 여물다 마스크를 놓고온 사실을 집밖에서 깨달았다. 다시 방역의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 아이의 손에 이끌려 간 놀이터에는 나처럼 끌려나온 아빠들이 ‘일렬횡대 헤쳐모여’다.
 
혹시나 하는 우려심은 다른 공터로 향했고, 아이를 달래가며 공놀이를 즐겼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겨울 햇볕은 따스했고, 부는 바람은 스산했다.
 
공놀이에 실증을 느낀 아이는 어느덧 시소 타기를 요구했다. 시소를 타기 위해서는 아까 그 놀이터로 향해야했다. ‘그래 지금쯤이면 사람들이 많이 없겠지’라는 생각은 떼쓰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어느덧 놀이터에 다다랐다.
 
허나 예상과 달리 놀이터는 적막했다. 아빠부대들이 소리 없이 사라진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생각도 잠시, ‘아싸!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다’며 시소를 독점한 아이의 웃음소리는 연신 옥구슬을 굴렸다.
 
아이와의 행복한 순간도 잠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거리를 둔 채, 말을 건넸다. 아이와의 행복을 깨는 순간이 싫었던 나로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퉁명스러움으로 시소의 손잡이를 움켜줬다.
 
‘시소를 사수해야한다’, ‘양보할 수 없어’라는 강한 의지는 찰나의 순간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가 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자신도 한 아이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그는 확진자인 초등학교 학생이 이 놀이터에서 놀다갔다며 주의할 것을 알려왔다.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고마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갈곳 잃은 성탄절, 아이들과의 웃음꽃을 피우던 아빠부대들이 사라진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시설물과 접촉했던 피륙을 파악하며 빛의 속도로 집으로 향한 나는 소독과 세탁물을 봉인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쉈다. 그 놈은 어느덧 집앞까지 와있었다.
 
이규하 정경부 경제팀장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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