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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3화)재회, 모스크바 시간 여행의 시작
2020-08-31 00:00:00 2020-08-31 00: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마지막 동승객들
 
이제 약 31시간 후면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쉬엄쉬엄 여러 열차를 바꿔가며 달려오다 보니, 시베리아 철도의 마지막 기차에선 또 누구를 만나 어떤 얘기를 듣게 될까 은근히 기대가 된다. 이번 객차에는 특히 노년층이 많이 보인다. ‘혹 1번 차량이라 그런가?’ 문득, 슬류쟌카에서 이르쿠츠크로 갈 때 만났던 갈랴 씨(16화 참조)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늘 1호차만 타는데, 그 칸이 제일 조용하고 깨끗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외선이었고 이것은 종류가 많은 횡단열차니 단순히 대입하긴 어렵겠다.
 
늘 그렇듯 내 자리는 2층이다. 맞은편에는 중년의 알렉 씨가 크게 코를 골며 자는 중이고 아래층에는 두 노신사, 자긍심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아나톨리 씨와 침착한 인상의 세르게이 씨가 말없이 신문이나 책, 휴대폰을 보고 있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도 말을 걸지 않는다. 이전 객차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뭔가 금속성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침묵이 내내 지속되지는 않았다. 차창 밖 풍경에 대한 내 질문을 시작으로 대화가 확산돼, 각자 자신이 학창 시절에 겪은 재미난 일화들을 풀어놓는다. ‘그 시절 소련 사회’의 특징이 드러나는 유쾌한 이야기들에 종종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역시 다들 지루했던 것이다.
 
아나톨리 씨가 '군사-산업 배달원'이라는 전 러시아 주간 신문을 읽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군사-산업 배달원>이라는 전(全)러시아 주간 신문을 읽고 있던 아나톨리 씨는 자신이 80세지만 새벽 1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휴대폰을 보는 것을 즐긴다고 말한다. 건설업계에 종사했던 그가 연해주, 캄차카 반도로 출장 다닌 얘기를 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세르게이 씨의 경험담이었다. 한 순간의 결정이 인생행로를 바꾸게 된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은퇴한 지 약 3년이 됐다. 1958년생이니 그가 우드무르트 공화국의 글라조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대학 입학시험을 치러 갈 때는 197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기차로 7일 걸려서 갔는데 도중에 도둑을 맞아 돈을 잃어 4일 동안 다른 승객들이 나를 먹여줬지요. 3일까진 괜찮았지만 4일째가 되니 회의가 들었고 5일째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시험은 잘 쳤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방학 때 집에 오가느라 2주일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는 결국 먼 동쪽의 대학 대신 입대해 군복무를 마치고 경찰 내부를 감사하는 법 집행관으로 일하게 된다. 일을 위해선 고등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동시에 통신 수업으로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세관원으로 일했어요. 소련의 내부였던 공화국들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이 형성되면서, 왕래하는 상인들이 세관을 통과할 때 그들의 물품에 대해 세금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었지요. 한 나라였는데 외국이 됐으니... 사람들이 법을 잘 몰라 종종 도와줘야 했습니다. 내 일은 아니었지만... 처벌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림처럼 보이지만, 기차 창문의 얼룩과 반사된 형광등이 있으니 사진임에 분명하다. '상점 2번'이라는 소련식 간판이 붙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청년에서 중년으로, 레나의 학계 체험
 
새벽 4시11분, 기차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드디어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야로슬랍스키 역의 플랫폼을 서둘러 나서는데, 저 끝에 레나가 웃으며 서 있다! 20대 초반의 여학생은 이제 중년이 되었다. 막판에 휴대폰 심카드마저 갑자기 끝나버려 꼭두새벽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는 친구의 전화도 못 받고 애타게 만들었다. 기숙사의 내 방을 수시로 찾아 진지한 토론과 우스개 잡담을 주고받던 친구, 좋은 영화가 막 시작되니 빨리 텔레비전을 틀어보라고 전화로 알려 주던 그 친구 덕분에 소련 시대의 영화도 많이 익혔다.
 
레나는 당과 관련된 학교를 전신으로 계승한 신생 국립대학에서 도쩬트(조교수, 부교수급)로 근무했다. 그러나 2016년 그녀는 그 대학을 떠났는데, 그녀가 겪은 경험에는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와 교육 개혁 문제, 정치인의 개입, 대학 내 권력 투쟁과 부패가 다 반영돼 있다. “2004년 1월, 일을 시작할 땐 사회철학과였는데(그녀의 전공이기도 하다), 몇 년 후 대학이 신학과를 만들었어. 세속의 국립대에서 말이야. 현재 러시아에는 몇몇 국립대학에 신학과가 있어. 그런데 가장 나빴던 건 철학과와 신학과를 통합해 ‘철학·종교학·신학’과라는 하나의 학과를 만들어 버렸고 내가 몇 년간 거기서 일했다는 거야. 나는 어디서 일하는지 말하기도 창피했지.”
 
중년이 된 옛 친구 레나가 이른 새벽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역에 마중 나와 환히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사진/필자 제공
 
그녀가 여러 해 경력으로 얻은 도쩬트 직함도 철학과와 신설된 신학과와의 통폐합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회 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매우 흥미가 있고(그녀의 학위 논문 주제였다) 사회철학과에서 처음 가르친 것도 종교학이지만, 학과가 통폐합되자 내게 그 수업을 주지 않았어. 내가 무신론자에 유물론자였기 때문이지. 교수진이 계속 해고되고 그 뒤 학과는 다시 분리됐어. 2004년 1월 50명이었던 교수진은 2016년에 4명이 남았어.” 결정적으로, 총장직 승계를 놓고 벌어진 암투와 테러 행위에 질려 레나는 그 대학을 떠났고 더 이상 다른 학교에서 가르칠 의욕도 잃었다. 그녀는 현재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교생들에게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과외교사로 생활한다. 전문대학에서 가르치던 그녀의 동료도 경영진의 자녀들에게 학점 특혜를 주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과외교사가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 러시아는 교육체계 전반에 개혁을 단행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만난 올랴, 엘랴 자매가 이 시기에 ‘교육시스템이 발전’했다고 말한 게 이것이었다(31화 참조). 사실 변화는 90년대부터 시작됐다. 레나와 내가 다니던 철학부는 제1인문관의 11층에 위치한 덕에, 가난한 학부라서 꼭대기에 있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외국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을 때도 철학부가 어문학부보다 저렴했고 제2인문관의 경제학부보다는 좀 더 저렴했다. 어떤 전공이 인기 있고 중시됐는지 학비에서 드러난 셈이다. 물론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다행이었다. 현재 러시아 학문의 각 분야가 어떤 상태인지 그 안에 있지 않으니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레나의 사례에서 씁쓸함을 느낄 뿐.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역. 레나의 차를 찾아 가느라 주차장 쪽 모습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진정한 학자를 만나는 기쁨
 
빅토르 알렉세예비치 바쥴린(1932~2012), 모스크바 국립대학 철학부 교수. 1980년대 말 그가 속한 '맑스-레닌주의 철학사과'(1992년부터 '윤리학과'로 개칭됨)에서 촬영된 사진의 사본이다. 사진/필자 제공
 
레나는 학창 시절 만났던 뛰어나고 덕망 있는 교수들을 자신이 일하던 학교에선 볼 수 없었다고 실망스러워 했다. 레나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1995년~1996학년도, 우리가 모두 존경하고 따랐던 바쥴린 선생님의 수업에서였다. 모스크바 국립대학 철학부 교수 빅토르 알렉세예비치 바쥴린(V. A. Vazulin, 1932~2012). 내가 머물던 90년대에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의 수업을 일부러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러시아, 그리스, 레바논, 키프로스, 그리고 나 한국, 이전 세대라 못 만난 독일 제자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룹을 이루었다. 러시아의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바쥴린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친구가 된 것이다.
 
바쥴린 선생님의 묘가 있는 다닐로프(다닐롭스코예) 공동묘지 입구에는 타오르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있다.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박헌영의 아내인 주세죽의 묘도 여기에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사진/필자 제공
 
나는 모스크바에서의 첫 일정으로 미샤와 스베따를 만나(24화, 25화 참조) 빅토르 알렉세예비치의 묘지를 찾았다. 그는 늘 헌신적인 조력자였던 그의 아내 소피야 드미트리예브나의 가족들 묘에 함께 묻혀 있다. 아내가 먼저 떠나 자신의 부모님과 오빠 옆에 누웠기에 그도 그곳에서 함께 안식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가슴을 에는 듯한 느낌이 아직도 일어난다. 그는 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진정한 학자였고, 놀라운 지성과 포용력과 인내심을 갖춘 스승이었으며, 누구든 깊은 인간애와 존중으로 대하며 병마와 싸울 때에도 호기심과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게 될 큰 행운은 외국학생담당부의 고운 할머니 비서 베얄라 빠빌로브나와의 대화에서 시작됐다.
 
선생님의 아들 미샤, 제자이자 미샤의 아내가 된 스베따가 바쥴린 선생님의 묘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이름 아래에 아내와 그 가족의 이름들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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