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더 플랫폼’은 공간이다. 이 공간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그곳이다. 우선 수직 구조다. 필연적으로 계급이 따라온다. 위층은 권력이다. 아래 층은 피지배를 받는다. 지배와 피지배의 수단은 음식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비슷한 플롯이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수평구조였다. 무려 1004개의 열차 구조를 통해 머리칸과 꼬리칸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구조를 그려낸 바 있다. 수직 구조의 계급 사회를 그린 영화도 있다. 역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하지만 ‘더 플랫폼’은 몇 십 발자국 더 나아간다. ‘설국열차’를 수직으로 세워 버렸다. ‘기생충’이 된다. 지하실과 1층 그리고 2층으로 나뉜 공간의 ‘기생충’을 수백 개로 분화시켰다. ‘더 플랫폼’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만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상상이 아니다. 음식을 통해 권력의 생리를 명료하게 담아내고 인간 심리로 묘사한 방식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jpg)
이 영화의 플롯은 너무도 단순하다. 우선 시대적 배경은 없다. 가까운 근 미래, 혹은 과거일수도 있다. 이 공간은 어떤 집단이 운영을 한다. 감각적으론 사설 감옥쯤으로 다가온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연상된다. 수감된 사람들은 ‘왜 들어왔는지’를 모른다. 자의 반 타의 반이다. 물론 이것도 추측이다. 공간이 존재하고 사람이 존재한다. 공간 중간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한 층에는 두 명이 존재한다. 각 층의 사람들은 이 공간은 ‘구덩이’라고 부른다. 아래 층에는 또 다른 층이 있다. 그 아래 층에도 또 다른 층이 있다. 위로는 몇 개의 방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이 있는 공간에는 번호가 존재한다. 당연히 위로는 몇 개의 공간이 있는지 가늠이 된다. 하지만 아래로는 몇 개의 공간이 있는지 모른다. 수십 개 혹은 수백 개가 있을지 모른다. 이 단서가 공포가 아니다. 이 공간의 진짜 기괴한 공포는 30일마다 랜덤으로 방의 위치가 바뀐다는 점이다. 지하 몇백 층으로 떨어질지, 불과 몇 층으로 올라갈지. 그래서 이 공간은 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의 의미는 공간 중간에 뚫려 있는 구멍이 의미한다. 구멍으로 하루에 한 번 음식이 배달된다. 온갖 산해진미가 내려온다. 1층부터 내려오는 음식은 각 층마다 일정 시간 머무르며 2명의 사람에게 공급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음식은 아래 층으로 내려간다. 결과적으로 몇 십층, 혹은 몇 백층 아래 있는 사람은 음식을 공급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각 층에는 두 명이 존재한다. 몇 십층 아래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존을 할까.
영화 '더 플랫폼' 스틸
‘더 플랫폼’의 키워드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불안감이다. 주인공인 한 남자는 현실의 불안감을 위해 이 공간에 스스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은 외부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돼 있다. 무엇을 해도 된다. 버티면 된다. 버티고 버티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을 손에 쥘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함께 있는 또 다른 남자를 통해 이 남자는 ‘그럴 수 있을까’란 의문을 점차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의문은 또 다른 불안으로 이어진다. 현실에서의 불안을 위해 단절된 이 공간으로 들어온 자신의 선택은 결코 그 불안과 떨어질 수 없는 선택이었단 것을.
사실 함께 있는 이 남자가 실체인지 아닌지 조차 의문스러운 지점까지 간다. 그 남자는 어떤 과정을 통해 주인공의 자의식으로 변질된다. 끊임없이 질문한다. 끊임없이 괴롭힌다. 현실에선 올라가고 내려가는 계급의 구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외부와 단절된 이 공간에선 더욱 명료화 된 것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떨어져 있다. 때론 올라가기도 한다. 이제 올라가고 내려가고의 문제가 아니다. 불안은 시작이 된다. 살 수 있을 것 인가. 살아갈 수 있을 것 인가. 가운데 구멍으로 내려오는 음식을 취할 수 있는 높은 층에서 깨어나고, 또 음식을 취할 수 없는 수백 층 아래에서 깨어나길 반복하면서 이 남자는 길들여 진다. ‘어차피 너도 똑 같은 인간일 뿐이다’라는 자의식(함께 있던 또 다른 남자)의 질문은 주인공을 갈등하게 만든다. 이젠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가 이 공간에서 생존의 질문으로 변질이 된다. 현실에서의 ‘어떻게’와는 결과 질이 전혀 다른 질문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부와 명예 권력의 본질이 아니다. 이 공간에서의 ‘어떻게?’는 깨어난 층에서 어떻게 30일을 버티고, 어떤 층에서 깨어날지 모를 불안을 버티는 생존의 본질로 변화가 된다.
영화 '더 플랫폼' 스틸
이런 본질 변화 핵심은 음식이다. 각층의 가운데 뚫린 공간으로 내려오는 음식은 각층의 권력 구조화를 만들어 낸 핵심이다. 30일의 시간 동안 위층은 힘을 얻는다. 아래 층은 지배를 받는다. 사실 음식은 충분하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끝도 없는 수백 층 아래 수감자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위층의 권력자들은 아래층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 이기심이 아니다. 권력의 핵심이다. 힘은 나누는 게 아니다. 배려가 아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이 공간에선 3가지 사람만 존재한다. 올라가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 그리고 떨어지는 사람(자살). 음식은 이 3가지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된다. 생존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수단을 던지고 인간 사회의 기본 논리가 되는 권력화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 순간부터 인간이 아닌 본능의 존재로만 남게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키워드는 질서와 무질서다. 수직 구조다. 질서 정연한 논리다. 하지만 실체를 들여다 보면 더 없는 무질서가 존재하고 있다. 위와 아래, 단순한 구조 속에서 논리는 생존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배려의 원칙은 깨져 버렸다. 질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수직의 구조가 오히려 무질서의 법칙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영화 중반 이후 이 질서를 위해, 시스템을 깨버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무질서의 동력은 더욱 힘을 발휘하는 장면은 우리 사회 현실의 민 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충격파로 다가온다.
영화 '더 플랫폼' 스틸
영화 후반 모든 구조와 규율 그리고 시스템을 부셔 버리기 위해 선택한 ‘메시지’는 문제의 핵심을 다음 세대로 넘기겠단 의미일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이 논리를, 이 법칙을, 이 시스템을 타파할 동력이 떨어진 상태다. 하지만 노력은 해봐야 한다. 주인공의 선택은 그 노력이다. 열린 결말의 구조화로 영화는 마무리를 짓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란 질문에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 인지라고. 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름끼치는 은유의 향연이다. ‘더 플랫폼’이 그리는 공간은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부끄러운 민 낯일 뿐이다. 개봉은 5월 13일.
P.S 국내에선 제3세계 영화로 치부되는 스페인 영화다. 이 점이 ‘더 플랫폼’의 유일한 단점일 뿐이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