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채명석·안창현 기자] 3일 별세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87년 삶은 ‘100년 두산 기틀을 다진 장남 리더십’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할아버지인 매헌 박승직 창업주, 부친 연강 박두병 회장의 뒤를 이어 오너 3세 시대를 연 그는 한국경제가 가장 드라마틱한 성장을 거둔 1980년대와 건국 이후 가장 큰 좌절을 겪은 1990년대의 두산그룹을 이끌었다. 1996년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형제 경영권 계승 및 4세로의 되물림을 무난하게 유도하는 등 두산의 새로운 100년 시대를 열면서 오너 일가 맏이이자, 그룹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영면했다.
박 명예회장의 일생에는 두 명의 부친이 있었다. 연강이 박 명예회장의 혈연적 부친이었다면, 사업적 부친은 국내 대기업 가운데 최초의 전문경영인으로 불리는 수천 정수창 두산그룹 회장이었다. 앞서 “자기가 사장이라고 반드시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해왔던 연강은 1973년 임종을 앞두고 수천을 두산그룹 회장에 앉혔다. 그러면서 “내가 다음 회장을 자네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자네 다음 사장은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내 의사를 쓸데없이 촌탁해서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상 박 명예회장의 장래를 수천에게 맡긴 것이다. 이후 수천이 두산그룹을 지키는 동안 박 명예회장을 비롯한 형제들은 그를 따랐고, 1981년 수천의 뒤를 이어 박 명예회장이 회장에 오르게 되었다.
수천의 가르침은 박 명예회장이 두산그룹을 전문 경영인체제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심어줬다. 실제로 박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 최고경영자(CEO)를 대거 등용하는 한편, 형제와 자식·조카들은 단계를 밟아 올라오도록 해 CEO로서 인정을 받은 혈육들에게만 자리를 허락했다. 소비자 업종에서 중화학 산업으로 그룹 사업구조가 바뀌면서 전문 경영인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오너 일가는 그룹의 큰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두산은 국내 어느 대기업 못지않게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고하다. 오너 일가는 전문경영인들이 제안한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큰 결단을 할 때마다 박 명예회장의 댁에 모여 논의를 한다”면서 “이 때에도 박 명예회장은 의견을 내놓기 보다는 동생과 자식·조카들의 생각을 듣고 이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1996년 5월 두산그룹 신 CI 선포식에서 새로운 심벌이 새겨진 그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두산그룹
연강이 강조해왔던 ‘인화’와 ‘인재’는 박 명예회장 시대에 더욱 구체화 됐다. 박 명예회장은 “인화로 뭉쳐 개개인의 능력을 집약할 때 자기실현의 발판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나온다”고 말했다. 또한 “‘인화’란 ‘공평’이 전제되어야 하고, ‘공평’이란 획일적 대우가 아닌 능력과 업적에 따라 신상필벌이 행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사원이 일생을 걸어도 후회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박 명예회장은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가 생전에 한 아래와 같은 발언에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잘 담겨있다. “두산의 간판은 두산인들이다. 나야 두산에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지만 두산인은 영원하다”면서 “나는 무엇보다 사람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노력하는 사람, 그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인화와 인재에 대한 신념은 지속적인 ‘혁신’으로 이어졌다. 회장 재임 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앞서 동양맥주에 재직중이던 1964년에는 당시 국내 기업에서는 생소하던 조사과라는 참모 조직을 신설해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 수립, 예산 편성, 조사 업무 등을 수행하며 현대적 경영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부단한 혁신을 시도했다. 1981년 그룹 회장을 맡은 이후 1985년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따라 설립했다. 1974년에는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사장에 취임해 세계적인 통신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은 그가 이뤄낸 큰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 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기업 매각 및 인수 과정에서 박 명예회장은 항상 해당 기업 임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일을 진행하라고 강조했다. 그가 주창한 “나에게도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라는 ‘걸레론’은 지금까지 두산그룹의 M&A 전략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인수시에는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극대화하고 상호 시너지 창출에 주력하고, 매각할 때에는 금액이 적더라도 고용을 승계하고 기업가치를 더욱 키워줄 파트너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채명석·안창현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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