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첫 미국 순방길에 동행하고 있는 경제인단이 잇따라 선물 보따리를 풀어내며 새 정부의 대미외교에 힘을 보태고 있다. 북핵 문제 등 난제들을 놓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테이블을 마주해야 하는 문 대통령으로서는 큰 우군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자국에 대한 투자를 통한 고용창출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재계는 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첫날(현지시간 28일)부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투자계획을 내놨다. 첫 테이프는 삼성이 끊었다. 삼성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정부와 3억8000만달러(약 4329억원)를 들여 신규 가전공장을 짓는 내용의 투자의향서(LOI)를 체결하며 문 대통령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동시에 줄기차게 투자를 압박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도 화답하며 일거양득을 취했다. 정무적 목적을 배제하더라도, 미국이 삼성전자의 중요한 전략시장임을 감안하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평가다.
SK도 이날 최태원 회장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미국의 GE, 콘티넨탈리소스와 미국 셰일가스전을 공동 개발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와 액화석유가스(LPG)를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전세계에 판매하는 활로도 열었다. SK는 이를 위해 5년간 1조8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으며, 3~5조원 규모의 잠재적인 투자 기회도 모색하고 있다. 셰일자원 확보를 통해 원유에 의존하던 기존 에너지사업의 큰 변화도 모색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두산도 힘을 보탰다. 두산중공업 미국법인 DHIA는 미국 가스터빈 업체 ACT를 인수하는 내용의 MOU에 사인했다. 앞서 현대차는 지난 1월 기존 공장 증설 및 신규공장 신설을 포함해 향후 5년간 친환경·자율주행 자동차 등 미래기술 개발과 새 엔진 개발 분야에 31억달러(3조5355억원)를 투자하는 계획을 내놨고, 문 대통령 방미 직전인 27일에는 미국 내 소아암 환자 치료 지원에 1500만달러(약 170억원)를 기부하기로 했다. LG전자 역시 지난 2월 테네시주와 2억5000만달러(약 2852억원) 규모의 세탁기공장을 설립하는 MOU를 체결했다.
방미 경제인단 구성을 이끈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경제인단에 참여한 4대그룹을 비롯해 GS와 두산, 한진, CJ, LS 등이 발표한 올해 대미 투자는 128억달러(약 14조5753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10대그룹의 국내 투자가 약 50조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재계는 이번 방미를 겨냥해 사전에 치밀하게 투자계획을 설립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출범과 함께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건 새 정부에 대한 눈치와 함께 자국 투자를 종용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특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정경유착의 적폐가 낱낱이 드러난 데다, 여론 또한 냉랭해진 상황에서 국정 지지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문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재계 관계자들의 고백도 전해진다. 실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28일(현지시간) 열린 '한미 비즈니스 서밋' 인사말을 통해 "한국은 '더 진일보한 국가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기업인들도 개혁의 발걸음에 동참, 더 성숙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정부 정책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재계의 대규모 대미 투자계획은 30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돌입하는 문 대통령에게는 큰 힘이 될 전망이다. 문 대통령에게는 북핵 문제를 비롯해 한미동맹에 대한 대내외 우려를 불식시킴과 동시에 한미FTA 재협상 가능성 등 통상 압박을 풀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사드 배치도 양국 정상이 풀어야 할 주요 의제 중 하나다. 주고받는 외교협상의 치열한 전략싸움을 고려할 때 우선순위는 북핵 문제에 대한 우리정부의 자주적 입장 관철과 한미동맹의 재확인에 있다는 게 정치권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런 상황에서 순방에 동행한 경제인단의 대미 투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갈망하는 통상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순방 첫날 경제인단과 차담회를 갖고 "나는 친노동이자 친기업"이라며 "정부는 기업하기 좋고 공정하며 투명한 경제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유화적 태도를 내비쳤다. 이전 정부의 비정규직 대책에 반발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을 지목, "재계는 반성부터 하라"며 경고했던 태도와는 크게 대비된다.
한편, 이번 방미 경제인단에는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황창규 KT 회장이 제외되면서 해당 그룹들은 침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최순실 사태에 연루된 점을 들어 정부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설까지 나돌고 있다. 정권 교체기마다 회장이 중도 하차하는 잔혹사가 혹시 재연될까 재계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포스코와 KT를 지켜보게 됐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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