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 보안전문업체 비이소프트는 지난해 2월 보안솔루션 ‘유니키(Uni-Key)’를 특허 출시했다. 개인정보가 유출돼도 피싱, 파밍 등 금융사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2채널 보안서비스다. 올 4월 우리은행은 유니키를 빼닮은 ‘원터치 리모컨’ 서비스를 공개하고, 금융권 최초로 개발된 ‘신개념 보안서비스’라며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유니키와 원터치 리모컨은 금융거래 시 ‘리모컨 ON’, ‘예약 금융거래’, ‘예약거래 자동차단’ 등의 핵심기술이 모두 같다. 게다가 지난 1년간 비이소프트가 우리은행에 유니키 관련, 사업 제안서와 기술 설명을 여러 차례 진행해왔다는 점에서 우리은행의 기술 탈취 의혹이 짙게 풍긴다.
#. 18년 동안 포스코의 협력사였던 중소기업 오성은 막대한 비용을 쏟은 끝에 포스코가 의뢰한 종이 슬리브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상용화를 위해 공장을 신·증설했다. 오성은 지난 1999년 종이 슬리브 기술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으나, 2001년 포스코 간부 등 직원 3명이 오성의 특허 등록 사양에서 특허번호만 삭제한 채 포스코 ‘자재규격서’로 둔갑시켰다. 이에 오성은 포스코에 내용증명을 보내 항의하는 한편, 특허청에도 도용 사실을 알려 포스코의 특허 등록을 무산시켰다. 포스코는 기술에 대한 공동특허 출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오성이 거절하자 다른 기업과 납품계약을 맺었다. 결국 오성은 문을 닫았다. (중소기업청이 펴낸 대기업의 기술 탈취 사례 중에서)
중소기업이 오랜 기간 피땀 흘려 개발한 특허기술이 우월적 지위를 앞세운 대기업에 의해 탈취당하는 사례가 끊이질 않고 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최근 5년간 발생한 전체 기술유출 중 중소기업이 73%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기술유출 경험이 있는 155개 중소기업 중 143개 기업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총 피해금액은 2418억원으로 평균 17억원에 달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거래로 묶인 대·중소기업 간 갑을 관계 속에 문제 제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뿐더러, 소송 등 법적 대응을 한다 해도 승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분쟁은 거래관계가 끊기는 보복으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이어서, 중소기업으로서는 저승길과 같다.
◇성장 사다리? 탈취 사다리! 중소기업 특허분쟁 상대는 국내 중견·대기업
지난 10일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중소기업 특허경영 애로 조사>를 보면, 특허를 보유한 국내 500개 중소기업 중 절반이 넘는 271곳(54.2%)이 특허분쟁 가능성이 크거나 이미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분쟁 상대로는 글로벌 기업(13.7%)이나 특허괴물(8.1%)보다 우리나라 중견기업(28.8%)과 대기업(15.9%)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해외 특허괴물을 비판해온 국내 중견 또는 대기업들이 정작 국내에서는 약자인 중소기업의 기술을 서슴없이 빼앗고 있다는 것으로, 성장 사다리를 내세운 정부 및 재계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피해 중소기업들은 대기업과의 관계에 있어 절대 을의 위치로, 자칫 피해 사례가 공론화될 경우 돌아올 2차, 3차 피해 우려에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게 일반적이다. 또 분쟁 조정이나 소송 등 법적 대응은 해당 대기업과의 정면대결로 비쳐져 낙인이 되기 십상인 데다, 승산 역시 장담키 어렵다. 취재팀이 최근 6년치 국정감사 정책자료집을 통합 취합한 결과, 대기업을 상대로 중소기업이 특허분쟁 소송에서 승소한 비율은 2008년 55.5%에서 2009년 45.25%, 2010년 47.4%, 2011년 44.6%, 2012년 40.7%, 2013년 36.6%로 매년 줄고 있다.
이는 곧 중소기업의 소송 기피로 이어졌다. 특허청 지식재산권 통계자료를 보면, 국내 특허 등록은 지난 2009년 5만6732건, 2010년 9만4720건, 2012년 11만3467건, 2013년 12만7330건으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데 반해 특허소송 청구 건수는 2008년 1만2238건에서 2013년 8111건으로 약 33.73% 감소했다. 막강한 자본력에 특허팀을 따로 운영할 정도로 대응 또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이어서 "대기업과의 싸움은 바위에다 계란 치기"라는 게 중소기업계 목소리다.
게다가 기술특허 등 지적재산권의 경우 기술에 대한 증거 확보와 입증 책임 등으로 대부분의 소송이 장기화되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승소해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 모바일 콘텐츠 업체 대표 김모씨는 7년을 끌어온 대기업과의 특허분쟁 과정에서 소송비용 및 변호사 수임료 등을 충당키 위해 50억원 상당의 사옥을 매각하고, 자사의 핵심기술을 HP에 넘기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정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정상적인 거래 관계의 탈을 쓰고 이뤄지는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 기술 탈취는 법원 등에서 중소기업이 피해사례와 기술 탈취에 관해 명확히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면서 "갈수록 대·중소기업 간 기술탈취 관련 소송에서 중소기업의 승소율이 떨어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동네빵집 제품도 돈만 된다면 내 것
대기업의 아이디어 탈취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국내 유명 제과·제빵 회사는 지난해 8월 ‘교황 빵’으로 명성을 얻었던 파주 프로방스 베이커리의 마늘빵 ‘키스링’과 유사한 빵인 ‘마늘링’을 선보였다. 동네 빵집이 수억원의 비용을 투입해 약 2년 간 100만명의 시식 테스트를 거쳐 개발한 제품을 대기업이 이름까지 비슷하게 출시했다.
프로방스 베이커리는 대기업의 특허권 침해로 제품가치가 하락해 단기 매출 손실이 1억원에 달하자 해당 대기업 측에 판매 중단을 호소했으나, 대기업은 되레 올 3월 특허청에 키스링에 대한 특허무효 심판청구서를 제출했다. 파주를 지역구로 둔 윤후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중재로 지난달 대기업이 청구를 취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대기업이 어디까지 뻔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기록됐다.
IT 업계에서도 아이디어 베끼기가 난무한다. 지난해 11월 돈톡 개발사인 브라이니클은 메신저 대화창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메시지가 삭제되는 '펑 메시지'를 개발·서비스했는데, 다음카카오가 똑같은 서비스인 ‘펑 쪽지’를 내놓으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는 사이버 검열 의혹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던 때로, 소규모의 IT 벤처기업이 내놓은 기능을 IT 공룡인 다음카카오가 이름까지 똑같이 따라하면서 도용 논란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에 대해 해당 대기업들은 "이미 알려졌거나 보편화된 기술들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자본력 있는 대기업들이 시장윤리를 망각하면서, 정치권이나 언론 등을 통해서라도 문제가 불거지지 않으면 해당 기술은 금세 대기업의 간판을 달고 시장을 활보하게 된다.
조영민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기획팀장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는 법률적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면서 “중기청과 특허청의 권한이 취약해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무엇보다 분쟁 조정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중소기업의 고통은 배가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초기 단계지만,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 입법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부 뒷북 대책…그마저도 비현실적
중소기업청은 올 1월 기술 유출과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산하 대·중소기업협력재단 내에 ‘중소기업 기술보호센터’를 설치했다. 동반성장위원회와 함께 하는 중소기업기술분쟁조정·중재위원회는 판사·변호사 등 직능위원 22명, 기계·소재 등 기술분야 전문위원 15명 등 총 37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위원회를 두고 ▲조정 3개월, 중재 5개월이라는 빠른 분쟁 해결 ▲조정 및 중재에 드는 비용 지원 등 분쟁시 중소기업의 취약점을 꼽히는 요소들을 보강하며 출발했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중소기업기술분쟁조정·중재위원회가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다. 우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문제를 조정이나 중재하는 역할에 그치는 데다, 연간 정부 지원액이 5억원 수준에 불과해 조정·중재시 기술평가(건당 1000만원)도 벅차 소송비용 지원은 엄두도 못 낸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홍보도 부족해 8월 말까지 단 6건만이 조정·중재·취소·진행·완료됐을 뿐이다.
이상경 대·중소기업협력재단 본부장은 “대·중소기업 간 기술분쟁이 만연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대기업에 대한 눈치 탓에) 조정까지 끌고 오는 것 자체가 중소기업으로서는 굉장히 힘든 작업이어서 부담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장을 맡고 있는 우원식 의원은 "기술분쟁의 경우 갑을 관계가 명확한 대기업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분쟁 조정이나 중재 기능만으로는 역부족일 수 있다"면서 "위원회의 법적 지위를 강화해 조사와 처벌, 이마저도 어렵다면 최소한의 고발권을 통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으로부터 기술 탈취 피해를 경험한 한 중소기업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핵심 정책기조인 ‘창조경제’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중소기업의 기술특허나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것부터 출발해 산업의 밑바탕을 튼튼히 다져야 한다"면서 "대기업이 기술과 인력을 마음대로 빼가는 현 구조를 방치하고서는 백약이 무효"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