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충영 동반성장위원장을 비롯한 동반위원들이 지난 2월24일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제33차 동반성장위원회'를 열고 있다. 사진/뉴시스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가 시행 5년차를 맞아 존립 위기에 처했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적합업종 법제화 요구를 묵살한 것도 모자라, 적합업종보다 완화된 형태인 상생협약 확대로 방향을 잡으면서다. 대·중소기업 간 힘의 차이를 감안할 때 강제력 없는 민간 자율협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다.
적합업종 제도는 지난 2011년 동반위가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을 위해 제조업 82개 품목을 선정하면서 시작됐다. 적합업종 선정은 중소기업 사업자 단체와 대기업 합의로 이뤄진다. 동반위는 협의 내용을 바탕으로 진입 자제, 사업 철수 등 권고사항을 발표한다. 올해 적합업종은 사업 축소 15개, 확장 자제 52개 등 79개(2월 기준)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시장침투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2015년 6월) 자료:중소기업중앙회
대기업의 진입 장벽을 높여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보호하겠다는 적합업종 제도는 그간 상당 부분 효과를 봤다. 중소기업연구원은 지난해 7월 발표한 '적합업종 지정 전후 2년간 중소기업 성과 분석'에서 "적합업종 지정 이후 매출액 증가율과 총 자산 증가율이 높게 나타났고, 수익성 지표에서도 적합업종 기업은 상승했으나 적합업종 혜택을 받지 못한 중소기업은 하락했다"고 밝혔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도 "적합업종 업체의 평균 매출액 증가율은 지난 2012년 7.19%로, 전체 제조 중소기업 증가율(4.5%)과 비교하더라도 1.6배 이상 높다"고 분석했다.
적합업종 제도를 바라보는 국민 시선도 매우 긍정적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발표한 '대기업의 중소기업 시장 침투에 대한 대국민 인식 조사'를 보면, 국민 1000명 가운데 88.5%가 '적합업종 제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51.6%는 '적합업종을 확대해야 한다'고 답해 '현상 유지'(33.7%), '축소 또는 폐지'(8.3%)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실태조사(2013년 11월) 자료:김제남 의원실
문제는 적합업종 제도를 운영하는 동반위의 무기력함에 있다. 적합업종 선정 효과와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커지고 있는 데 반해, 법제화를 통한 강제력 요구에 대해서는 회의적 접근으로 일관하고 있다. 스스로 규제의 칼날을 내려놓음으로써 존재 이유를 망각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승우 동국대 교수가 지난 2013년 11월 적합업종 사업자 단체 57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기업이 적합업종 권고안을 잘 이행한다'는 답변은 절반(43%)도 되지 않았다. 적합업종 제도의 가장 큰 문제로는 '제재 수단 부족'(60%)을 가장 많이 꼽았다. 중기중앙회가 지난해 2월 조사한 결과에서도 적합업종 신청단체 46곳 가운데 72.5%가 '동반위 권한 강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 같은 지표는 여론 압박만으로는 대기업을 감당키 어려운 실정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체감하는 적합업종 장벽도 높다. 동반위 자료를 보면, 지난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적합업종 신청 311건 가운데 선정된 업종·품목은 98건에 불과하다. 철회와 반려는 171건으로 절반이 훨씬 넘는다.
대기업과의 합의에 이르기도 어려운 데다, 적합업종 선정 과정이 지나치게 대기업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한 소상공인 단체 관계자는 "편파적인 분위기도 문제다. 회의에 들어가니 어떤 공익위원은 대형마트 쪽에 '이쪽 의견 받아들일 생각 없죠?'라며 합의를 깨려는 태도까지 보였다"며 "동반위원 가운데 대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동반위는 적합업종 선정 대신 상생협약을 늘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3년 기한이 끝나 재합의 테이블에 오른 82개 업종·품목 가운데 다시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건 49개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새로 선정된 적합업종도 5개에 그친다. 이에 대해 안충영 동반위원장은 "적합업종은 3+3년으로 한시적이고, 협력 틀을 만들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며 “민생 품목은 적합업종을 유도하고, 나머지는 상생협약으로 전환하는 것이 생명력 있는 방향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정의당 중소상공인·자영업자위원장인 김제남 의원은 "적합업종이 줄어들고, 낮은 수위인 상생협약으로 바뀌는 건 대기업의 반발을 반영한 결과"라며 "동반위가 동반성장 '추진' 기구가 아닌 '눈치' 기구로 전락하고 있다. 대기업에 쏠린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유명무실한 기구로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적합업종 제도는 2006년까지 유지되던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적합업종은 고유업종보다도 한참이나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기업이 합의주지 않으면 적합업종 선정조차 불가능하고, 여론 압박 외에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중소기업·소상공인 쪽에서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제화를 주장해온 이유다.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장은 "동반위는 라이트급과 헤비급을 같은 링 위에 올리고 이기는 편의 손을 들어주는 행태를 보인다"며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동반위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법제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훈·이순민 기자 soonza00@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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