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은 지난해 11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고,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은 이달 '국가안보 과학기술전략'을 내놨습니다. 잠재적 적대국의 도전과 동맹국·협력국의 기여를 거듭 강조한 것은 미국의 우위가 더 이상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실토인 동시에, 국가 역량을 재건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중국의 성장과 국제분업을 활용해 제조업과 수출을 키운 한국에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중국 관계 조정과 미국 현지 투자 확대, 기술 보호 강화와 방위 부담이라는 청구서가 놓여 있습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는 미국의 대전환이 한국에 가져올 기회와 부담을 살펴보고, 이를 국운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국가의 역할과 정책금융의 과제를 짚어봅니다.
한국은 국제질서가 크게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성장 공간을 찾아왔다. 중국의 고속성장과 국제분업이 확대되던 시기에는 중간재와 자본재를 공급하며 제조업과 수출을 키웠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도 반도체와 석유화학, 철강과 기계 분야의 시장을 넓혔다.
중국이 한국에 성장을 선물한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과 노동자들이 산업 기반과 기술력을 갖추고 중국의 성장을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세계 최대의 생산기지와 시장이 가까운 곳에서 빠르게 성장한 것은 한국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번에는 미국이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와 조선, 원전과 배터리, 방산 분야에서 한국은 이미 생산능력과 기술, 경험을 갖추고 있다. 국제질서가 전환될 때마다 새로운 성장 공간이 열렸다는 점에서 한국은 분명 운이 좋은 나라다.
다만 좋은 운이 저절로 국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중심의 재편에는 새로운 시장과 함께 대중국 관계 조정, 미국 현지투자 확대, 기술보호와 방위 부담이라는 청구서가 따라온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2025년 8월27일(현지시간) 미국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열린 선박 명명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행사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조시 샤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등이 참석했다. (사진=한화)
한국 제조업에 다시 열린 창
미국은 핵심 산업을 국내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했지만 단기간에 모든 생산능력을 복원하기 어렵다. 조선소와 원전 공급망, 반도체 공장과 방산 생산시설은 자본만 투입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숙련인력과 협력업체, 오랜 생산 경험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국이 취약성을 느끼는 여러 산업에서 동시에 협력할 수 있는 국가다. 반도체 생산과 첨단 조선, 원전 건설과 운영, 배터리와 방산 제조 능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의 공장과 기술, 인력은 공급망 재편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한국의 자본도 필요하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유럽 국가들이 보유한 순대외자산과 다자개발은행의 자산을 활용해 중국이 영향력을 키운 세계 기반시설·공급망 시장에 대응하려 한다.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뿐 아니라 정책금융과 민간금융까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블록의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
기회는 분명하다. 미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이 커지고 원전과 조선, 방산과 첨단 기술의 제3국 공동 진출도 확대될 수 있다. 중국 중심의 분업 구조에서 축적한 제조 역량을 미국 중심의 새 공급망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기회에는 청구서가 따른다
미국의 제조업 부활이 곧 한국 제조업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동맹국 중심 공급망에 앞서 자국 내 생산을 우선한다. 국내 공급이 부족할 때만 신뢰할 수 있는 협력국의 기업을 활용하겠다는 원칙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지을수록 미국의 투자와 일자리는 늘어난다. 반면 국내 투자와 숙련인력, 협력업체의 일감이 함께 빠져나갈 위험도 있다. 한국 기업의 해외 매출이 증가하더라도 국내 산업 생태계와 고용이 약해진다면 이를 온전한 국가적 성과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의 기술과 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도 까다로워지고 있다. 수출통제와 투자심사, 연구보안과 데이터 관리에서 미국 기준을 따라야 한다. 중국과의 기술협력과 투자를 줄이라는 압박도 커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주요 시장이자 생산기지다. 미국 중심 공급망에 참여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어디까지 유지할 것인지는 가치와 진영의 구호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산업별로 기술 수준과 중국 시장 의존도, 대체 가능한 공급망과 예상 손실을 따져야 한다.
안보 부담도 함께 늘어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국방비 확대와 실질적인 군사 역량 강화를 요구한다. 기술·산업협력의 확대와 함께 시설 접근과 방위산업 생산, 지역 안보에서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기회와 비용을 한꺼번에 계산해야 하는 이유다.
국가 역할 재정립, 구호를 넘어 실행으로
기업의 판단에만 맡겨서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지키기 어렵다. 미국의 보조금과 시장을 보고 해외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개별 기업에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국내 생산과 고용, 협력업체와 기술 기반이 약해진다면 국가적으로는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정부는 어떤 기술과 생산능력을 반드시 국내에 남길 것인지 정해야 한다. 어떤 분야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생산할지, 어느 공급망에서 한국이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확보할지도 선택해야 한다. 해외투자를 지원하면서 국내 산업 기반을 유지할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정책금융은 단순히 기업의 미국 투자에 필요한 돈을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원을 통해 핵심 기술과 지식재산이 국내에 남았는지, 국내 협력업체의 수주와 투자가 늘었는지, 양질의 일자리와 수출이 만들어졌는지를 성과로 평가해야 한다.
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국가의 역할을 다시 세우고 여러 분야에서 대전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방향 자체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전환은 대통령의 담론이나 구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책금융의 성과를 공급액과 집행률 중심으로 평가하고, 산업·기술·금융·인력 정책을 부처별 칸막이 안에서 따로 집행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기존의 예산과 성과평가 방식을 그대로 둔 채 대전환을 말한다면 이름만 바뀐 사업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문제의식에 고위 관료와 기관장들이 얼마나 협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청년과 기후를 빼놓은 국운은 없다
국가의 역할은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전환의 비용과 성과를 누구에게 어떻게 나눌지도 국가가 답해야 한다. 산업과 기술의 전환이 일부 대기업과 수도권, 고숙련 인력에게만 기회가 된다면 국가전략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기업의 해외투자와 첨단산업에는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면서 청년에게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높은 주거비용, 경쟁의 부담만 남긴다면 대전환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기 어렵다.
특히 2030세대의 기를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들은 산업 전환과 고령화의 비용을 부담하면서 성과는 가장 늦게 받을 가능성이 큰 세대다. 국가적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새로운 산업에서 일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부터 제시해야 한다. 교육과 직업훈련, 주거와 지역 일자리, 노동시장 격차를 산업정책과 함께 다뤄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소득과 자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대와 지역, 기업 규모와 고용 형태, 교육과 기술 접근성까지 ?여러 영역에서 격차가 중첩돼 있다. 이를 줄이지 못하면 외부에서 찾아온 기회도 일부 기업과 계층만의 성과로 끝날 수 있다. 산업 전환의 성과를 고르게 나누는 것과 함께 그 방향이 지속 가능한지도 따져야 한다.
기후위기도 미국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다. 미국은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중립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석유·가스·석탄·원자력을 통한 에너지 우위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한국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탄소 감축을 함께 달성할 독자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전력망과 에너지저장장치, 효율 향상을 산업·안보 정책의 틀에서 함께 다뤄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도덕적 구호가 아니라 미래 시장과 기술표준, 에너지 비용을 좌우하는 산업전략이다.
한국은 중국의 성장기를 활용해 산업국가로 도약했다. 이제 미국이 추진하는 재산업화와 기술국가주의가 두 번째 기회를 열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외부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미국과 함께 만들고 무엇을 국내에 남길지, 그 성과를 청년과 지역, 중소기업에 어떻게 나눌지 결정해야 한다. 기후위기라는 인류의 과제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좋은 국제환경은 행운이지만, 그 행운을 국민 모두의 미래로 바꾸는 것은 국가의 능력이다. 그것이 비로소 국운이다.
정재호 뉴스토마토 고문·K-정책금융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