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국가의 귀환, 한국의 선택①패권도 혼자서는 지킬 수 없다
'잠재적 적대국' 견제하고 동맹 역량 총결집
제조업·에너지·금융까지 안보 자산으로 재편
약점 인정한 미국, 동맹 블록으로 패권 재건
2026-08-24 16:09:13 2026-08-24 16:50:51
미국 백악관은 지난해 11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고,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은 이달 '국가안보 과학기술전략'을 내놨습니다. 잠재적 적대국의 도전과 동맹국·협력국의 기여를 거듭 강조한 것은 미국의 우위가 더 이상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실토인 동시에, 국가 역량을 재건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중국의 성장과 국제분업을 활용해 제조업과 수출을 키운 한국에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중국 관계 조정과 미국 현지 투자 확대, 기술 보호 강화와 방위 부담이라는 청구서가 놓여 있습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는 미국의 대전환이 한국에 가져올 기회와 부담을 살펴보고, 이를 국운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국가의 역할과 정책금융의 과제를 짚어봅니다.
 
미국의 국가안보 과학기술전략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말은 인공지능이나 양자기술이 아니다. '잠재적 적대국'과 '동맹국·협력국'이다. 잠재적 적대국은 첨단 기술과 군사적 응용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핵심 광물과 공급망을 장악하며, 미국의 지식재산과 민감한 데이터를 노리는 존재로 거듭 등장한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과학기술전략에서는 주로 '잠재적 적대국'이라고 표현하지만, 국가안보전략은 아시아 부분에서 중국을 직접 지목한다. 중국을 세계시장에 편입하고 미국 기업의 투자를 늘리면 기존 국제질서에 순응할 것이라는 지난 30여년의 기대가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한편 동맹국과 협력국도 끊임없이 호출된다. 미국은 이들의 과학기술 역량을 '전력 승수'로 활용하고, 공급망과 연구보안, 투자심사와 수출통제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 한다. 세계 최강국이 적대국의 도전과 동맹국의 기여를 이처럼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미국의 형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실토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정상들이 2025년 6월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NATO)
 
세계화를 설계한 미국의 '실패 선언'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의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스스로 실패로 규정한다. 외교정책 엘리트들이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구적인 지배를 추구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 국민이 원하지 않는 부담까지 떠안았다고 비판한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내보내고 값싼 상품을 수입하는 동안 미국의 중산층과 산업 기반은 약해졌다. 동맹국들이 방위 부담을 미국 국민에게 떠넘기도록 방치했고, 국제기구와 보편적 가치에 매달리느라 정작 미국의 핵심 이익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문제 삼는 것은 무역적자만이 아니다. 전쟁과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필요한 물건을 자국에서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핵심 광물과 반도체, 의약품과 에너지 부품, 무기와 탄약의 공급망이 경쟁국의 영향권에 놓이면 세계 최대의 군사력과 금융시장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해법이 '미국 우선주의'다. 앞으로 개입할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구분하고, 직접적인 국가 이익이 걸린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힘을 통한 평화, 비개입주의적 성향, 유연한 현실주의와 국가 주권의 우위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미국이 세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과는 다르다. 모든 지역에 동일한 관심과 비용을 쏟는 대신 미국의 경제와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는 더욱 강하게 개입하겠다는 선택적 집중에 가깝다.
 
경제의 모든 길이 안보로 통한다
 
가장 큰 변화는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미래는 제조업의 것"이라고 단언한다. 산업 생산을 국내로 되돌리고 핵심 광물과 원자재, 부품과 완제품을 외부 세력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국가안보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관세와 보조금, 규제 완화는 단순한 경기부양 수단이 아니다. 기업의 투자를 미국으로 유도하고 경쟁국 중심의 공급망을 재편하는 전략 도구다. 균형무역과 재산업화, 핵심 공급망 확보가 군사력 증강과 같은 선상에서 다뤄진다. 방위산업에서도 최첨단 무기뿐 아니라 탄약과 저비용 장비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제조 기반을 복원하려 한다.
 
에너지도 산업과 안보를 잇는 핵심 수단이다. 석유·가스·석탄·원자력을 통해 저렴하고 풍부한 전력을 공급해야 제조업을 되살리고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경쟁에서도 앞설 수 있다고 본다. 에너지 수출을 확대하면 동맹국의 미국 의존도를 높이고 경쟁국의 영향력을 낮출 수도 있다.
 
금융시장 역시 국가안보 자산으로 활용된다. 세계 최대의 자본시장과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미국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제재와 투자 제한, 해외 사업에 대한 금융지원과 시장 접근을 통해 다른 국가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다.
 
미국이 재건하려는 것은 개별 산업 몇 개가 아니다. 제조업과 에너지, 금융과 과학기술, 국방을 하나로 연결해 평시와 전시에 모두 작동하는 국가 역량을 만들려는 것이다.
 
경제전쟁의 최전선, 인도·태평양
 
이 같은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인도·태평양이다. 이 지역은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 국내총생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이동하는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산업·기술·군사 경쟁이 겹치는 공간이다.
 
중국은 미국의 관세와 수출통제에 대응해 공급망 장악력을 오히려 강화했다. 미국 시장에 대한 직접 수출 비중을 낮추면서도 제3국을 통해 대미 수출을 이어가고,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시장과 기반시설로 영향력을 넓혔다. 핵심 광물의 채굴·정련과 제조업에서 확보한 생산능력도 쉽게 대체하기 어렵다.
 
미국은 중국과의 모든 무역을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민감하지 않은 분야를 중심으로 관계를 재조정하려 한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양자와 원자력, 우주와 해저기술처럼 경제와 군사에 동시에 활용되는 분야에서는 우위를 지키고, 일반 상품에서는 상호성과 균형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군사적 억지와 경제적 우위도 분리되지 않는다. 미국은 장기적인 경제·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대규모 군사 충돌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본다. 강한 산업과 기술이 군사적 억지력을 뒷받침하고, 안정적인 안보 환경이 다시 경제적 경쟁을 지속할 여력을 제공한다는 논리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의 군사적 균형도 반도체 공급망과 해상교통로를 지키는 경제안보 문제로 연결된다.
 
동맹의 공장과 자본을 한데 묶다
 
동맹의 의미도 달라졌다. 과거의 동맹이 미국의 안보 우산을 제공받는 존재였다면 앞으로는 미국과 함께 생산하고 투자하며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존재다. 미국의 요구는 '부담 분담'을 넘어 사실상 ‘부담 전가’에 가까워지고 있다. 부유한 동맹국은 자국이 속한 지역의 안보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고, 미국의 수출통제와 기술보호 기준에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 대가로 기술 공유와 방산 조달, 상업적 우대와 자본시장 접근을 제공할 수 있다. 미국의 전략에 얼마나 긴밀하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기술과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지는 구조다.
 
경제력도 하나로 묶으려 한다. 미국은 자국의 30조달러 경제에 동맹국과 협력국의 35조달러를 더하면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계산한다. 유럽과 일본, 한국 등이 보유한 7조달러 규모의 순대외자산도 중국에 맞서 세계의 기반시설과 공급망 시장을 개척할 자원으로 본다.
 
미국은 동맹국의 자본과 다자개발은행을 묶어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해온 신흥국 기반시설·공급망 시장에 대응하려 한다. 동맹국의 공장과 기술, 자본과 금융까지 미국 중심의 경제 블록에 편입하는 구상이다.
 
약점의 고백, 질서 재편의 선언
 
그렇다고 미국의 쇠퇴를 선언하기에는 이르다. 미국은 약점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동맹국의 역량까지 동원하는 전방위적인 대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제조업과 에너지, 첨단 기술과 금융, 국방을 하나로 연결하고 국가의 자원을 장기 경쟁에 맞게 다시 배치하려 한다.
 
목표는 명확하다. 미국의 기술과 표준이 세계를 이끌고 누구도 쉽게 추종할 수 없는 '1등 아메리카'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경제와 기술, 안보의 경쟁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공급망 통제와 수출 제한, 투자심사도 일상적인 국가안보 수단이 될 것이다.
 
한국이 마주한 변화는 단순한 미·중 갈등이 아니다. 미국이 자국의 힘을 다시 만들기 위해 세계의 생산과 기술, 자본의 흐름을 새롭게 조직하는 과정이다. 미국의 동맹이라는 사실만으로 기회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이 어떤 생산능력과 기술, 자본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국내에 남길 것인지에 따라 새 질서에서의 자리가 결정될 것이다.
 
정재호 뉴스토마토 고문·K-정책금융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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