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국민헌장? 상위 국가비전?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고 1년 가까이 지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훌륭한 성과를 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각종 제민(濟民)에 있어서 업적이 쌓여서 국정 지지도가 한층 치솟아 올라간 것도 인정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4월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런데 어딘가, 뭔가 허전한 것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발표한 123대 국정과제를 다시 한번 훑어봤습니다. 국가비전, 국정원칙, 국가목표, 국정과제를 뜯어보니 개별 과제들 하나하나는 말이 되고도 남는데 그것들을 범국가적 에너지로 '묶어 세우는 한마디 말'이 없어서 그런 기분이 계속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 우리 시대의 정신과 생존 전략을 꿰뚫고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역량을 모으는 그 한마디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옛날식으로 '국민헌장'이라고 해도 좋고, 그냥 '상위 국가비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필자는 그것을 감히 우리 민족의 DNA에 내재된 해양과 대륙을 관통하는 '개방형 통상국가'에서 찾고자 접근해 봅니다. '개방형 통상국가'라는 개념은 현재도 잘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별도로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변화하고 재편되고 있는 세계 질서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방향과 속도'를 한층 강화하여 이러한 세계사적 대전환을 주도해야 합니다.
역사적 DNA : 해양과 대륙을 잇는 문명의 가교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늘 세계와 소통하면서 번영했던 '개방형 유전자'가 흐르고 있습니다. 해양(海洋)은 백제의 22담로와 통일신라 장보고의 청해진, 고려의 벽란도로 이어지며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을 주도한 선구적 모델이었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지중해와 흑해를 둘러싼 폴리스 연합과 같은 역동적 개방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대륙(大陸)은 고구려와 발해가 유라시아 대평원을 연결하는 '초원의 길' 무역의 시작점으로 동서 교류의 거점 역할을 당당히 해왔습니다.
역사는 증명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었을 때는 쇠퇴했고,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을 때 국운은 융성했습니다. 이러한 개방성은 작금 문명의 양대 사조가 된 '인공지능(AI)과 기후 변화'라는 전 지구적 문명 전환기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일제(日帝)가 심어 놓은 식민지 반도(半島) 사관부터 청산해야 합니다. 그 토대 위에서 우리 민족은 기술적으로 우수한 배(舟)와 말(馬)의 탁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드넓은 해양과 대륙을 누비며 동서양의 문명을 융합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실현했던 '글로벌 허브'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뿌리 정신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이러한 교류 속에서 생성된 이념이기에 오늘날에도 인류 공영에 기여할 수 있는 위대한 보편 가치로 자랑스럽게 앞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정과제의 확장 : 글로벌 룰 메이커(Rule Maker)로의 도약
이미 잘 알다시피 추격의 시대를 넘어 선도의 시대로 가야 합니다. 지난 반세기 우리보다 앞선 국가들을 부지런히 뒤쫓던 '추격자'였다면 이제는 스스로 길을 내고 여러 방면에서 타국이 우리를 따라 배우는 '선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국익 중심 외교'라는 수동적 프레임을 넘어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드는 '룰 메이커'로 체급을 높여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 공급망 재편, 즉 세계 경제질서의 신블록화는 우리에게 크나큰 기회로 작용할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물리적 힘으로 인위적으로 공급망을 분절시킬 때(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어 더없이 복잡한 국제 분업 구조 속에서) 대한민국은 그 틈새를 신뢰와 기술로 메워 주는 '연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상품 수출을 뛰어넘어 AI 디지털,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우주, 해양, 안보 방위 등 각종 산업을 포괄하는 '글로벌 통상 생태계'를 주도해야 합니다. K-컬처를 넘어 K-시스템과 K-가치와 신뢰를 수출하는 '소프트파워 강국'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경제적 이익은 기본이고 문화적·생태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 대한민국이 원전 수출, K-방산, AI 국제 표준을 주도하고 있듯이 목적의식적·전방위적·합목적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속도를 배가해야 할 때입니다.
동어 반복이지만 특별히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인류사의 새로운 문명인 'AI 문명'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AI 시대의 통상은 국경 없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교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4월21일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중소기업기술마켓 AI 동행 포럼'에서 AI공급기업 관계자가 AI를 활용한 정수장 점검로봇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사회적 합의 : 위대한 대항해를 위한 국가적 선언
'개방형 통상국가'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우리 민족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살아가는 이치'를 현대적으로 회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는 이런 기치 아래 국민적 역량을 결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세계를 무대로 정책을 제안하고, 인류의 난제를 함께 고민하는 '위대한 개방형 국가'로의 대항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홍익인간의 정신을 담은 우리의 문화적 자산은 세계 시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열고 만들고 연결하는 통상의 길이 인류 공영의 길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 문제'를 조망해 보면 '우리 민족끼리'나 '1대1 대화를 고집하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드는 것 역시 식민지 반도(半島) 사관의 아류라고 이제는 재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북한을 유라시안 네트워크, 알타이어족 연합, 북극항로 관계국 회의 등 N분의 1로서 대우하고 열린 국가로 유도하는 것이 더 유연하고 더 효과적인 '대화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방형 통상국가!' 이 말 한마디가 시대정신이요 국민헌장이요 상위 국가비전이 되기를 서원(誓願)합니다.
정재호 뉴스토마토 고문·K-정책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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