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가 스토킹범?…역고소 도구가 된 '스토킹법'
사과·문제 제기도 범죄화…피해자가 '피의자' 되는 구조
2026-01-02 15:06:24 2026-01-04 18:12:10
[뉴스토마토 신다인 기자] 과거 무고·명예훼손죄에 집중됐던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 전략이 최근 스토킹처벌법으로까지 번지는 모양새입니다. 사과나 해명을 요구하는 피해자의 연락이 '상대방 의사에 반한 반복적 연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겁니다. 이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가 도리어 스토킹 피의자로 몰리는 주객전도식 사례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2022년 9월20일 오전 진보당 당원들이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과 관련한 '여성혐오젠더폭력STOP 진보당 전 당원 추모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스토킹처벌법 강화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역고소를 하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1993년 신정휴 서울대 교수가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2018년 고은 시인은 자신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에게 1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2017년 여성가족부(현 성평등가족부)가 후원하고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가 제작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에선 역고소의 개념이 명확히 규정됐습니다. 이에 따르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문제 제기를 위축하고 입을 막기 위해 피해자를 형사 고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모든 행위는 '성폭력 역고소'에 해당합니다. 역고소의 구체적 방법엔 무고죄, 명예훼손죄, 협박죄, 모욕죄 등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역고소 전략이 스토킹처벌법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과나 해명을 요구하는 과정 자체가 상대방 의사에 반한 반복적 연락으로 해석·인정되면서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문제 제기를 막기 위해 스토킹처벌법을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는 동시에 스토킹 혐의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지게 됐다"고 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 대표를 둘러싼 고소·고발 사건 역시 이런 맥락입니다. 정 대표는 지난해 12월9일 전 동료였던 A씨(여성) 측이 젠더 기반 폭력 및 저작권 침해와 관련한 내용증명을 보내자, 그달 17일 A씨를 스토킹처벌법 위반과 공갈미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자 A씨는 이틀 뒤인 19일 정 대표를 상대로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장을 서울경찰청에 제출했습니다. A씨의 법률대리인인 박수진 혜석 대표 변호사는 "내용증명을 통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형사 소송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자, 정 대표 측이 선제적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고소에 나섰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사례는 비단 특정인만의 일이 아닙니다. B씨는 2023년 준강간 피해를 입어 가해자를 고소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도리어 가해자로부터 스토킹처벌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역고소를 당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해온 C 변호사 또한 "교제하던 남성에게 폭행을 당한 여성이 형사 고소를 진행하자, 남성이 기다렸다는 듯 스토킹 혐의로 맞고소한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과거 역고소는 무고나 명예훼손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스토킹처벌법을 활용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다"면서 "무고나 명예훼손 성립되기까지 입증 과정이 길지만, 스토킹처벌법은 일정 수준 이상의 연락 기록만 확보되면 신고할 수 있었다. 이런 구조를 이용해 가해자가 먼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악용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2021년 10월 시행된 스토킹처벌법은 상대의 의사에 반해 불안감과 공포감을 주는 행위를 스토킹으로 규정합니다. 물리적으로 따라다니는 행위뿐 아니라 문자나 영상을 전송하는 행위도 포함되며, 이것이 반복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스토킹 행위가 반복될 우려만 있어도 경찰은 100m 이내 접근 금지나 연락 금지 등 강력한 '긴급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데, 역설적으로 가해자들이 이 조항을 피해자의 입을 막는 방패로 쓰고 있는 셈입니다.
 
현행법이 스토킹 행위의 '목적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는 빈틈을 노린 겁니다. 행위의 반복성과 상대방 의사에 반했다는 요건만 충족하면 법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의 사과 요구는 물론, 채권·채무 관계에서의 변제 독촉마저 스토킹으로 몰릴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법의 취지를 벗어나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반면 일본은 우리보다 앞선 2000년에 '스토커 규제법'을 제정하며 규제 대상을 명확히 했습니다. 일본 법은 스토킹을 '특정 대상에 대한 연애 감정, 혹은 그 감정이 좌절된 데서 비롯된 원한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법에 담아 무분별한 남용을 방지한 것입니다.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는 "최근에는 누가 먼저 고소해 '피해자 위치'를 선점하느냐가 중요해진 분위기"라며 "스토킹처벌법은 본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므로, 수사 단계에서부터 행위의 반복성뿐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맥락과 당사자 간 권력관계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역시 "스토킹 신고로 잠정조치나 긴급조치가 내려질 경우, 사건의 맥락이나 책임을 충분히 따져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며 "모욕이나 협박 등 다른 범죄 유형과 스토킹을 구분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신다인 기자 shin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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