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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안티프래자일 행정망
2023-11-30 06:00:00 2023-11-30 06:00:00
인기 걸그룹 르세라핌의 노래 "안티프래자일"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했을 때 굴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더 강해지는 것을 주제로 한 곡이다. 곡의 앨범 커버에 사용된 킨츠기 문양을 통해 강인함과 회복력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킨츠기는 깨진 도자기를 금이나 은으로 이어 붙여 수리하는 일본의 전통 기법으로, 깨짐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철학을 반영한다. 나심 탈레브가 제안하여 널리 알려진 ‘안티프래자일’ 개념은, 불확실성, 변화, 스트레스, 충격 등에 직면했을 때 단순히 견디는 것을 넘어서 성장하고 강해지는 특성을 의미한다.
 
최근 정부 행정망의 마비 사태는 한국 IT 인프라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정부는 장비의 불량을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이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지 못했다. 장비 하나가 불량이어서 서비스가 중단되는 일은 오늘날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수준의 장애 원인이 아니다. 이 사태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 정부 행정망 전반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촉구한다.
 
지난해 카카오톡 먹통 사태 당시, 정부는 카카오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개선 계획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국회는 이후 ‘카톡 먹통 방지법’까지 발의해 통과시켰다. 물론 카카오톡은 한국인의 일상에 깊게 자리 잡은 중요한 통신 수단이다. 하지만 그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카카오톡은 결국 민간 서비스일 뿐이며, 사용자들은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정부는 하나뿐이고 공공 서비스가 마비된 상황에서 사용자들에게는 대체할 수단이 없다. 카톡 먹통 방지법은 정부의 먹통과는 무관했으며, 정작 자기 일을 두고는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대응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이번 사태를 두고 한 보안 전문가는 한국 IT 서비스의 새벽 시간 점검 관행을 지적하며, 이러한 관행이 한국만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제공 방식에서 기원하는 것임을 논하기도 하였다. 아마존이나 구글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특정 시간대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 어디에서나 중단없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혁신을 지속해 왔다.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나 구글이 만든 쿠버네티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내부적인 솔루션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다른 기업과 조직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이 서비스의 중단 없는 매끄러운 시스템 업그레이드와 같은 일을 가능케 한다. 한국의 보편적 관행이 실은 글로벌 트렌드와 동떨어져 있으며, 궁극적으로 IT 서비스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의 온라인뱅킹 시스템은 자정 무렵에 일제히 서비스를 중단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의 금융 산업이 독과점 구조에 의존해 글로벌 경쟁력이 필요 없는 사업 방식을 유지한다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사용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하는데, 충분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 서비스 제공자들은 글로벌 트렌드를 반영하여 무중단 서비스 제공을 위한 기술과 방법론을 채택하고, 서비스의 연속성과 사용자 경험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먹통 사태의 책임자인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고 발생 당시 디지털 정부를 홍보하기 위해 해외 출장 중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디지털 강국의 허상을 상징처럼 드러낸다. 메타버스와 같은 수요 없는 사업에 돈을 쓰며 거기서 민원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식의 껍데기 서비스에 집착할 일이 아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사태에도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안티프래자일’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이철희 고등과학원 수학난제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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