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정말 아이러니할 정도로 정확하게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면 파악 못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할 정도입니다.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길 찾기가 너무 쉽게 설명돼 있습니다. 온전하게 완벽한 길라잡이가 존재하는 듯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영화에 한정된 설명이라면 얘기는 완벽하게 달라집니다. 우선 영화는 예측 불가능의 우연성이 담보돼야 하는 결과물입니다. 영화를 소비하는 소비자, 즉 예비 관객에게 이 포인트는 선택의 주된 동력이 됩니다. 물론 모든 정보를 알지 못하고 예비 관객들은 영화를 선택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까지 온다면 영화 소비의 핵심이자 무형의 마케팅으로 불리는 입소문 전략에서 최악의 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실 악수 중에 악수입니다. 영화 ‘교섭’이 이 같은 패착에 빠져 버린 것 자체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면 좋은 메시지를 넘어 좋은 영화라 주장한다 해도 그 안에 매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표면적으로 ‘교섭’은 좋은 방향성과 좋은 메시지를 담고 볼거리를 더해 영화적 완성도의 양념을 더했지만 힘을 받아 앞으로 뻗어나가야 할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고 더해서 말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이미 이 영화, 보지 않았어도 기승전결의 끝을 우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대로 ‘교섭’은 예의 바르게 흘러갑니다. 황정민과 현빈은 딱 그 만큼의 존재감과 그 존재감에 걸맞는 연기만 선보입니다. 오히려 이 영화 자체에 불필요해 보이는 강기영이 ‘교섭’의 엔딩 크레딧 이후 머릿속에 또렷한 잔상으로 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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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은 2007년 7월 샘물교회 교인들의 아프가니스탄 선교 피랍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당시 전 국민이 이 사건에 공분했습니다. 그들을 납치한 탈레반 만행을 향한 공분이 아니었습니다.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 탈레반의 점령 지역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무리하게 입국한 그들 선택을 비난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국가에선 아프가니스탄 입국에 엄격한 관리를 해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교섭’은 분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 반대였습니다. 전 국민의 분노와 질책을 떠안은 당시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객관화. ‘그래서 그러면 그들은 우리 국민이 아닌 게 되는 것인가’라고. 그들의 행위적 비상식에 대한 분노 이면에 공동체가 가져야 할 책임과 자세. 나아가 국가의 책무까지.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교섭’은 결과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 개인의 잘못된 선택과 그 잘못된 선택이 모여 만들어 낸 예상치 못한 거대한 사건 파고의 원인을 묻는 게 아닙니다. 공동체의 문제 그리고 그 문제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 그 책임에서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또 그 존재의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거시적 담론의 형태에서 ‘교섭’은 상당히 올바른 방향타를 잡고 출발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는 것에 놀라울 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 말이죠. 국가의 역할과 책임론. 분명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동어반복에 대한 의미 퇴색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짜 ‘교섭’의 문제는 앞서 언급했습니다. 너무 공식에 충실 했단 점입니다. 고민의 흔적도, 노력의 흔적도 볼 수 없는 결과물이었습니다.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교섭’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두 명입니다. 원칙주의자 공무원인 외교통상부 소속 교섭관 ‘정재호’(황정민) 그리고 과거 사건의 트라우마를 안은 채 중동 지역을 떠도는 국정원 베테랑 요원 박대식(현빈). 대식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원칙을 고수하는 공무원과 그 원칙을 무시하는 야생마 같은 현장 요원. 결국 서로에게 소리 없이 스며들고 흡수되는 과정이 사실상 이 영화 서사의 전체입니다. 앞서 언급한 국가의 존재 의미와 책임은 정재호 그리고 박대식 두 캐릭터 간극이 좁혀지는 것으로 치환 시킵니다. 상당히 손쉽게 고민하지 않고 택해 버린 방식입니다. 고루하지만 분명 의미가 깊은 거시적 담론의 메시지를 덮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교섭’ 제작진은 이 방식이 꽤 영화적이고 교과서적 작화의 과정이라 자신했을 겁니다.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래서 ‘교섭’ 안 모든 에피소드가 유기적이라기 보단 기능적으로만 작동한다는 느낌도 드는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영화 초반 등장하는 교인들의 아프가니스탄 피랍 상황조차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느껴질 정도입니다. 전체 서사의 동력 자체가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피랍 에피소드를 통해 얻어져야 옳단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교섭’은 정재호-박대식 두 인물의 간극 변화에만 오롯이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교섭’은 실화가 모티브입니다. 모티브이기에 실화를 고스란히 옮긴 게 아닌 실화 자체에 베이스를 둔 극화란 얘기입니다. 서사의 기본 베이스가 확실하니 극화된 결과물은 탄탄할 듯한 예감을 들게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존재 이유와 책임’이란 대의 명제도 교섭 상황에서의 긴박함도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 액션도 모든 것이 각각의 상황을 완성시키기 위한 기능만 담당합니다. 각각의 에피소드 시퀀스 등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예고편에 등장한 대낮 폭탄 테러 장면, 극중 서사의 주요 변곡점으로 등장하는 영국 정보원과의 사건 교섭 상황 등이 딱 이렇게 작동합니다. 이 과정이 흘러가면서 재호와 대식이 서로를 바라보며 진심을 느끼고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만이 카메라의 시선 중앙에 자리할 뿐입니다.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 시선의 중앙에 자리한 정재호 박대식은 너무도 전형적입니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정재호의 신념은 전형성이란 굴레 안에서 도저히 벗어나게 만들여지가 없는 인물로서 보이게 극단적으로 재단 시킨 캐릭터일 뿐이다. 박대식은 스스로의 트라우마에 자신을 가둔 상처뿐인 야생마처럼 날뛰지만 정재호의 신념에 탄복하고 감화된 또 다른 전형성에 불과합니다. 이 과정은 상업 영화란 카테고리 안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반복되고 변주된 기본 골격이자 뼈대에 불과합니다.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결과적으로 ‘교섭’은 과잉도 절제도 나아가 그 자체로서의 온전하게 그릇을 가득 채운 정량으로서의 가치 무게도 채우지 못한 인상이 강합니다. 그나마 ‘교섭’이 만족시킨 것은 관객들의 예측을 이끌고 가기 위해 두 배우에게 정해진 길에 대한 길라잡이로서 역할로만 가능하게 만든 서사의 미완성 각색에 있다 단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 '교섭'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확언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예측이 불가능한 불확실성 서사가 불가능했다면 ‘모티브’란 차원의 테두리 안에서 창작의 고민과 상상의 확장을 더 넓히는 작업을 충분히 했어야 했습니다. 충무로 베테랑 중의 베테랑 임순례 감독의 고민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정도로 1차원적이란 점에서 ‘교섭’의 태도는 괴이할 정도로 올바릅니다. 황정민과 현빈이란 걸출한 두 배우의 존재감이 이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도 흥미로울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섭’에서 유일하게 극화된 인물 ‘카심’을 연기한 강기영의 존재가 간신히 이 영화의 영화적 의미를 부여 잡고 있는 듯하게 보일 뿐입니다. 1월 18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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