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넬, '음으로 그려낸 우주와 빛'
소리와 비디오의 상아탑…공연장이 '스타워즈'
폭포 같은 연출부터 로스코 색면화 같은 풍경까지
한국 대중음악 공연 연출 선도…연말 공연 '넬스룸'
2023-01-05 18:00:00 2023-01-05 18:00:00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물리적으로 빛이 우주의 끝에 달하는 데 138억년이 걸린다고 한다면, 이 음(音)으로 빚어진 빛이 마음에 도달하기까지는, 1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다섯개의 정사각 LED 평면과 그 안에서 시종 형태를 바꾸는 기하학적 추상 문양, 흩뿌려지는 단색들의 춤과 같은 찬란... 이것은 흡사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가 아닌가. 로스코의 색면화에서 꿈틀거리던 색들의 덩어리가 해체와 융합을 반복하며, 스크린을 터뜨리고 나올 듯 생동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10여년 간 연출 노하우를 결합시킨 '종합선물세트' 같은 무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했거든요. 폭포 같은 연출부터, 키네시스(물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모터) 기술, 정중앙의 시스루 LED, 블레이드 조명... 무대팀과 영상팀이 6개월 간 달라 붙어 거의 매일 같이 함께 고생했습니다."
 
1일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정재원(드럼)이 말했다.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이곳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를 마치고서다.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넬의 공연은 사운드와 무대 조명, 감각적 영상, 연출로 정평이 난지 오래다. 특히 매년 연말 열리는 ‘NELL'S ROOM(넬스룸)’은 2003년부터 이어져온 이들 대표 브랜드 공연이다. 조향까지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한 기획력은 한국 대중음악 공연 문화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역시 공연은, 과학과 미술을 적분처럼 쌓아올린 소리와 비디오의 상아탑. 조향까지 설계한 이 입체적 시공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잠시나마 꿈의 세계를 우주처럼 유영하는 것이었다.
 
몽롱한 투명 안개와 짙녹의 북유럽 초원 같은 음반, 트라비스 '더 맨 후(The Man Who·1999)'를 지나면 펼쳐졌다.
 
오로라 같은 그라데이션 조명 위로 장엄한 현악과 전자음악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Still Sunset'의 인트로 편곡 사운드가 붓을 길게 늘어뜨리는 듯한 정경이.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음의 파편들이 크레센도를 올려가며 점점 곡의 장정을 횡단할 때, 천장에 달려 있던 네 개의 사각 물체가 아래로 서서히 내려오고, 미술관 ‘화이트 큐브’를 연상시키는 공간 골조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공연은 귀로 느끼던 음의 세계를 시각으로, 물리적 실체로 구현하려 노력하고 마침내 완성시키는 캔버스와 같다. 모든 곡들은 단순히 앨범 안에 갇혀 있던 단순한 청각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곡들을 생명체로 보고, 색감과 이야기를 부여하고, 그것을 로스코의 에너지처럼 그려낸 것이다.
 
4개의 흑백 분할 멤버들 모습이 12개로 쪼개질 때부터 압도적 스케일의 영상 미학이 눈 앞에서 넘실댔다.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화이트 노이즈 색감이 넘실대는 'Home'을 지나면, 잿빛 도시 풍경이 일렁이는 'Dear Genovese'가 펼쳐지고, 다시 모네의 그림 같은 초현실적 유화가 길게 펼쳐지는 '유희'를 맞닥뜨렸다.
 
셀로판지 색감의 바둑판 같은 형상들이 춤추다가('환생의 밤'), 날 선 팔세토 가성과 겹쳐지는 붉은 풍경 아래의 벼락들('Burn'),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할 때, 8mm 카메라 감성의 흑백 필름 같은 영상 위-아래를 천천히 그어가는 유성우 같은 빛의 평행 궤도('어떻게 생각해').
 
정신을 잠시 가다듬어 보면, 주위가 어느새 스타워즈로 가득했다.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미쳤다"는 웅얼거림이 매 무대 전환 때마다 새어나왔다.
 
사운드스케이프 측면에서도 밴드는 줄곧 추상적이고도 우주처럼 공간이 넓은 느낌을 음악으로 구현하려 해왔다. 가상악기와 리얼악기(베이스, 기타, 드럼)가 최상의 균형을 찾아가는 모던록 풍 곡들을 입체적 영상으로 표현할 때 특히나 숨죽여 빠져들만 했다.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공연의 최대 백미는 중반부 ‘Sober’ 때였다. 천장에 달려 있던 분사 장치가 인공 비를 바닥으로 직사하고, 자욱한 드라이아이스가 맞물려, 아이슬란드 폭포 줄기 같은 황홀한 정경을 눈 앞에 그려냈다. 성당의 촛불처럼 은은한 건반의 타건, 나직한 목소리에는, 제임스 블레이크나 디엑스엑스에 뒤지지 않는, 습기 가득한 새벽 공기 같은 무채색 감성이 아른거렸다.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화면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며, 눈 앞에 음의 파도를 그려낸 'Ocean of Light'와 광활한 우주 풍경 위로 50개 블레이드 조명이 명멸하는 '백색왜성', 가운데 네 개의 사각 물체가 비행하듯 하나씩 떨어졌다 올라섰다를 반복하던 'All This Fxxking time'의 연출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들어 일상에선 꿈이 부정적 의미로 쓰일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조금 팍팍해진건지. 그런데 사실 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아름다운 거 잖아요. 힘든 순간을 잘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도 꿈이라 생각합니다. 바닥을 쳤을 때, 헤어나오게끔 해주는 것 역시 꿈이기도 하고요. 꿈 때문에 어려운 일도 힘들 일도 많겠지만, 다들 마음 속 작은 꿈 하나씩은 품고 살아갔으면 해요. 꿈 속에서나마 꿈을 꿨으면 합니다."(김종완)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LED 속 쏟아지는 커다란 회색의 정육면체들에서, 잿빛 도시와 무표정의 인간 군상을 상상했다. 베이스가 선 굵은 리듬을 쏟아내고, 가상악기로 구현한 전자 음의 멜랑콜리한 선율이 실내의 아드레날린 분비물을 점차 끌어 올리며 형형색색의 음향으로 번져갈 때, 화면 역시 반전된다.
 
수십개 다시 수백개로의 분할, 그리고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오색 찬란한 종이 가루들의 축제.
 
어느 봄날, 꿈속에서 잠이 들면, 그 안에서라도 이런 날들이면 좋겠다. 모든 것을 족쇄로 묶어버리려는 세상에 끝임없이 저항할 수 있는. 샤를 보들레르가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쓴 시를 인용해보자면, 꿈에 취하고 또 취할 수 있는.
 
세상은 늘 새로운 족쇄를 들고 올 것이다. 그럼에도 ‘잠수종’에서 ‘나비’를 보는 삶이길 바란다.
 
지난 3일(12월30일~1월1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이현정·조영훈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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