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딱 한 편 있었다. 2006년 개봉한 영화 ‘브이 포 벤테타’였다. 당시 이 영화 속 주인공 ‘브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면을 쓰고 나왔다. 맨 얼굴은 단 한 번도 안 나왔다. 가면 뒤 목소리만 등장했다. 실제 배우가 연기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이 배우, 정말 가면을 뒤집어 쓰고 이 배역을 소화 했단다. 할리우드 최고 명배우 중 한 명 휴고 위빙이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또 다른 영화 한 편이 개봉한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배우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등장한다. 다만 이 배우, 맨 얼굴이 아주 잠깐 등장한다. 맨 얼굴 노출 시간 전체를 더해도 채 1분이 될까 말까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배우가 맡은 배역 성격. 끔찍하고 무지막지한 아동 연쇄 납치 살인마다. 그래서 이 배우가 누구냐고. 수 많은 장르 영화에 출연했지만 국내를 넘어 전 세계 여성들에겐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단 두 편으로 로맨틱/멜로 장르의 신으로 등극했던 인물. 에단 호크다. 그가 두 눈으로 보기에도 끔찍한 가면을 뒤집어 쓰고 아동 연쇄 납치 살인마가 됐다. 더 놀라운 점은 ‘인지하지 않고’ 이 영화를 본다면 가면 속 인물이 결단코 에단 호크란 것을 알아 차리기 쉽지 않단 것이다. 심지어 가면을 벗고 나온 첫 장면에서조차 말이다. 문자 그대로 에단 호크가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존재감’을 선보인다. 영화 ‘블랙폰’이다.
‘블랙폰’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최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스티븐 킹의 아들 조 힐의 호러 단편 모음집 ‘20세기 고스트’ 중 동명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긴 결과물이다. 제작은 전 세계 영화 시장 최고의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가 맡았다. 이 정도만으로도 기대감을 끌어 올리기엔 부족함이 없다. 영화는 스릴러 그리고 초자연적 현상 여기에 어린 남매의 유대감과 연쇄 살인마 ‘그래버’의 존재감이 더해져 상당한 파괴력을 드러낸다.
영화 '블랙폰'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블랙폰’ 주인공은 13세 오빠 피니 그리고 11세 여동생 그웬. 남매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어머니는 없다. 죽었는지 집을 나갔는지 모른다. 그저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거센 폭력에 비춰 볼 때 후자에 가까워 보일 뿐. 다만 뭔가 다른 사연은 분명 있어 보인다. 아버지가 유독 딸 그웬을 몰아세우고 다그친다. 그웬은 밤마다 이상한 꿈을 자주 꾼다. 미래를 예지하는 듯하다. 아버지는 아내의 기질을 물려 받은 것 같다며 화를 낸다. 그래서일까. 피니와 그웬 남매, 우애가 깊다. 부재한 엄마의 자리 그리고 폭력적 아빠의 군림 속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특유의 밝힌 성격을 지킨 채 하루 하루를 버틴다.
영화 '블랙폰'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동네. 빈민층이 몰려 사는 이 동네, 얼마 전부터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라진 아이들 모두가 피니와 그웬의 학교 친구들이다. 경찰은 사라진 아이들 흔적조차 찾질 못했다. 동네는 점점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여 간다. 이런 분위기 속 피니가 타깃이 된다. 집으로 가던 피니가 한 남자와 마주친다. 검은색 벤에서 물건을 나르던 한 남자. 검은색 모자를 쓰고 얼굴에 두터운 화장을 한 듯하다. 그는 피니에게 물건 옮기는 것을 도와 달란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 남자, 피니를 납치한다.
영화 '블랙폰'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잠시 후 피니는 눈을 뜬다. 깜깜한 지하실. 더러운 침대 위. 사방이 벽이다. 한쪽 벽에는 검정색 전화기가 달려 있다. 한 쪽 벽 위에는 작은 창문이 있다. 너무 높아 13세의 피니가 탈출하기엔 불가능하다. 그리고 잠시 후 기괴한 표정의 가면을 쓴 한 남자가 지하실 철문을 열고 들어온다. 육중한 느낌의 철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이 남자. 이름은 그래버. 끔찍한 외모와 공간적 두려움이 더해져 피니는 옴짝달싹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당장 피니를 죽일 것 같진 않다. 먹을 것을 갖고 다시 온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딱히 말하진 않는다. 그리고 잠시 후 벽에 걸린 전화기가 울린다. 전화 속 목소리는 놀랍게도 피니의 동네에서 사라졌던 아이들. 친구라고 하지만 피니와 앙숙인 녀석도 있다. 그런데도 이 친구들, 피니에게 뭔가를 자꾸만 알려준다. 지하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피니를 잡아 이 곳으로 끌고 온 가면 속 의문의 인물 ‘그래버’에 대한 비밀들. 전화기 속 친구들, 동네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렇게 전화를 자꾸만 걸어 오는 걸까. 우선 피니는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전화기가 울릴 때마다 받는다. 그들이 알려주는 내용들을 토대로 탈출을 계획해 나간다. 같은 시각 피니의 동생 그웬은 꿈을 통해 오빠 피니의 행적을 하나 둘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13세의 피니 그리고 11세의 그웬이 의문의 아동 연쇄 유괴 살인마 ‘그래버’에 대항해 안과 밖에서 협공을 시작한다.
영화 '블랙폰'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블랙폰’은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 보면 좋을 듯하다. 첫 번째는 밀실 탈출 스릴러. 주인공 소년 피니가 납치된다. 다른 기존 장르 영화들은 납치 후 해결 과정을 주변 인물들에게 부여한다. 하지만 ‘블랙폰’은 오롯이 납치된 당사자에게 이 역할을 맡긴다. 사실상 피니 스스로 이 갇힌 공간에서 ‘어떻게’와 ‘무엇을’ 통해 ‘언제’ 빠져 나가느냐에 대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과정을 보고 즐기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초현실적 상황을 끌어온 것도 특별한 선택이다. 전화기 속 목소리들이 주는 정보를 취합해 하나 둘 단계를 풀어나가며 전진하는 피니의 모습은 일종의 성장 동력처럼 그려져 보기 좋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전화기 속 목소리 모두가 피니를 위한 것은 아니란 것. 누구는 피니를 위해 누구는 그래버의 악행을 막기 위해 또 누구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각자의 목적과 이득 그리고 시선은 다를지라도 목표는 한가지다. 피니의 탈출 그리고 그래버의 악행을 막기 위한 것이다.
영화 '블랙폰'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이런 피니의 성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당연히 그래버의 악행이다. 악행이라고 하지만 영화 속 그래버의 행위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악’ 그 자체라 볼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아동 연쇄 유괴 살인마답게 어린 아이들의 순수함과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자신의 가학적 욕구를 충족하는 듯한 모습에선 끔찍함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언제나 음식을 가져다 준 뒤 지하실 문을 반쯤 열어 두고 가는 그래버의 노림수가 이런 밑바탕을 갖춘 행위란 것을 인지하는 지점에 이르면 공포를 넘어선 폭력이 마주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마주하게 된다. 가장 의문점은 그래버의 행위 이유. ‘왜?’란 이유가 반드시 필요한 행위다. 하지만 ‘블랙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래버를 중심으로 한 여러 스토리를 잡아 나가는 스핀 오프를 제작사 블룸하우스가 반드시 주목할 듯하다.
영화 '블랙폰'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그래버의 이런 끔찍한 매력은 에단 호크의 연기가 만들어 낸 최강 존재감이다.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외모의 가면, 두 개로 분리되는 가면은 극중 그래버의 분열된 ‘자아’를 나타낸다. 이 가면을 통해 그래버는 전혀 다른 인물이면서 전혀 다른 존재로 인격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을 예측하게 만든다. 에단 호크의 존재감은 ‘블랙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의 연속을 이어나가게 만드는 연결고리 그 자체다.
‘블랙폰’, 이런 장르가 어린 두 남매의 성장 스토리로 풀려나간 것 자체가 흥미롭다. 그 흥미 속에 악역 그래버의 존재감을 살려낸 에단 호크의 연기가 압도적이다. 이 두 가지를 더 해 버린 제작사 블룸하우스의 프로듀싱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비교 불가 영역 속에서 존재할 듯하다. 7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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