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무려 10년 전 이 얘기 구성이 완성됐다. 그리고 영화 완성 뼈대가 되는 시나리오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사실상 10년 전 그때 기획과 구성 그리고 완성된 시나리오가 지금 개봉을 앞둔 극장 상영 버전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말도 안 되는 시작이지만, 10년 전 제작진은 지금 상황을 예견했을까. 이런 전제를 끌고 이 영화 속으로 뛰어 든다 해도 딱히 이상스럽지가 않다. 지금 현실은 하루가 다르게 이 영화 속 창작의 세계보다 더 직관적인 영화적 설정들로 가득 차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비상선언’이 그리는 세계의 끔찍함은 지금 현실의 안일함과 위태로움을 너무도 극명하고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어 관람과 체감의 영역을 벗어난 직관적 기준을 들이대야 할 정도다.
‘비상선언’은 항공기가 불가항력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무조건적 착륙을 선언하는 비상사태를 뜻한다. 제목에서도 짐작 되지만 사상 초유의 항공테러가 이 영화 기본 전제다. 하지만 흔한 항공테러, 즉 ‘하이잭킹’(운항 중인 항공기 불법 납치)이 아니다. 이 같은 설정부터 ‘비상선언’이 일반적 항공 테러 재난 영화와는 기준 자체가 다르단 점을 선언하는 조건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람 얘기다. 거대한 재난 상황에 맞선 각기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담아낸다. 재혁(이병헌)은 심한 아토피를 앓는 딸 치료와 요양을 위해 하와이로 떠날 준비를 한다. 공항에서 재혁은 묘한 느낌의 남자 ‘진석’(임시완)을 만난다. 자신의 딸에게 엄마가 왜 없는지, 어디를 가는지 캐묻는 행동이 이상하다. 재혁은 그저 오늘 하루 꼴사나운 일진 중 하나라 생각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신경 쓰인다. 그리고 자신과 딸이 탄 비행기에서 이 남자를 다시 보게 된다.
영화 '비상선언' 스틸. 사진=쇼박스
한편 형사팀장 인호(송강호)는 오랜만의 휴가에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아내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하와이 여행을 떠났다. 아내와 딸에게 볼멘소리를 잔뜩 들은 그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여느 때처럼 경찰서로 출근한다. 경찰서에선 후배 형사들이 ‘항공기 테러’ 제보를 받는다. 정체 불명 남자가 인터넷에 ‘항공기 테러 예고’ 동영상을 올렸다. 이런 제보와 영상 분명 장난이다. 후배 형사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인호는 미심쩍다. 혹시 모른다. 영상 속 남자 주거지 수배는 쉽게 됐다. 경찰서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후배들 만류에도 불구하고 ‘잠시 다녀오겠다’며 혼자 나선다. 그리고 직접 찾아간 영상 속 남자 집. 이 집에서 인호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남자, 부검 결과 사인이 기묘하다. 외상이 크지만 직접적 사인은 그게 아니었다. 더욱이 집안을 수색한 인호와 경찰들은 수상쩍은 녹화 테이프 수백 개를 발견한다. 테러 예고 영상 속 의문의 남자, 그리고 이 남자의 테러 예고. 아무래도 사실 같다.
영화 '비상선언' 스틸. 사진=쇼박스
다시 비행기 안. 수상쩍은 진석의 행동을 유심이 지켜보던 재혁, 승무원들에게 그의 신원 확인을 요청한다. 재혁의 딸에게 이미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 번 수상쩍은 행동을 한 진석. 승무원들이 확인한 진석의 신원은 다국적 제약회사 선임연구원이자 박사. 하와이행은 학회 참석 때문.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잠시 후 비행기 안에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승객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그리고 곧바로 사망한 승객. 이 모습을 지켜 본 진석.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표정의 웃음. 재혁은 그 표정을 보고 섬뜩함을 느낀다.
영화 '비상선언' 스틸. 사진=쇼박스
‘비상선언’은 몇 가지 전제 조건을 갖추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만들고 조율시킨다. 그리고 그 조율 속에서 벌어지는 폐쇄된 공간(비행기)과 폐쇄된 감정(지상의 사람들)이 충돌하는 지점을 통해 ‘진짜 재난’의 실체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먼저 ‘폐쇄’란 코드가 눈에 띈다. 18000피트 상공에 떠 있는 비행기. 121명 승객 전원이 타깃. 이 안에서 누군가 121명 승객 전원의 목숨을 노린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여기서 먼저 짚어볼 게 ‘어떤 방식’과 ‘어떻게’이다. 기존 항공 테러 공식은 ‘하이잭킹’. 운항 중인 비행기를 납치, 그에 따른 몸값 협상과 의도한 주장을 펼치는 방식. 하지만 ‘비상선언’에선 이 과정이 전혀 없다. 목적과 의도 그리고 방식이 드러나지 않기에 공포감은 더 짙다. 그 공포감은 비행기 내부 승객 체감을 말하지만 더 짙어진 직관적 공포는 지상에 머무는 대응팀을 향한다. 목적 자체를 알 수 없기에 대응 자체가 불가능하다. 형사팀장 인호와 국토교통부 장관 김숙희(전도연) 그리고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박태수 실장(박해준)은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은 테러범 의도에 혼란과 혼돈을 넘어 공포감을 느낀다. 지상 대응팀은 사실상 패닉 상태에 빠진다.
영화 '비상선언' 스틸. 사진=쇼박스
비행기 안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예상을 벗어난 상황으로 이끌려 간다. 폐쇄된 공간 속 121명 승객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의적으로 ‘산 자’와 ‘살 수 있는 자’ 그리고 ‘사실상 죽을 자’들로 등급을 나눈다. ‘나 하나 살자 이러는 것이냐’며 이런 경계를 나누는 그들 속내는 오롯이 ‘나 하나 살자’고 그러는 공포에 굴복하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그려내는 지점이란 점에서 소름 끼친다. 더욱 경악스러운점은 연출을 맡은 한재림 감독 선택이자 이 영화의 시선이다. 폐쇄된 비행기 안 승객들의 공포감은 환경적 요인에 따른 공포의 전염이란 측면에서 적나라한 상황 투여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지상 대응팀과 국민들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비상선언’이 그리는 테러와 재난 방식이 사실상 ‘인재’를 넘어선 ‘인재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 지점까지 온다면 전체 상황을 재난으로 끌고 간 ‘의문의 테러범’존재는 사실상 무의미해 진다. 이 영화가 그리는 테러 양상과 그 양상이 지적하는 다수와 소수의 경계가 만들고 구분하는 우리 사회의 혐오와 폭력의 근원까지 짚는다. ‘비상선언’이 국내 상업 영화 최초 항공 재난 상황을 그린다지만 이 영화의 진짜 재난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그리고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은 혐오의 시대가 도래한 이유를 지적하는 셈이다.
영화 '비상선언' 스틸. 사진=쇼박스
그래서 더 소름 끼치고 더 노골적이며 더 적나라하게 파고든다. 121명 국민이 죽음의 문턱에서 선택의 기로를 논할 때 정부 고위 관계자들 행태는 ‘책임’의 범주 안에서 모든 상황을 바라보려고만 하는 또 다른 폭력적 시각의 논쟁을 제시한다. 우리 사회 모든 계층간 갈등 원인과 이유 목적과 태생적 발생의 시작이 이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항공 재난 테러 등 여러 상업 영화 속 장르 범주를 끌어 들인 ‘비상선언’이지만 영화 후반부 사태와 상황의 마무리를 이끌어 내는 방식은 혐오스러운 수준의 블랙 코미디로서 특정 계층 인물들의 모순적 태도를 지적한다. 영화 마지막 김숙희의 통쾌한 대사 한 마디가 어쩌면 ‘비상선언’ 속 목적과 이유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영화 '비상선언' 스틸. 사진=쇼박스
단순한 상업적 재난 코드로 시작하지만 ‘비상선언’ 속 세계관의 헤게모니가 우리 사회 ‘민 낯’에서 한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았단 점이 기성세대로서 너무도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한재림 감독의 묵직한 연출력과 자칫 궤도를 이탈할 듯한 상황에서 길라잡이를 자처하는 연기 괴물들의 존재감이 어쩌면 현실의 재난에 대처하는 ‘윗 분’들의 탁상공론을 대처할 해법으로까지 여겨지는 아이러니가 ‘비상선언’이 가리키는 진심이라면 너무 섬뜩하지 않은가. ‘비상선언’이 여기까지 내다보고 ‘재난’이란 코드를 끌어왔다면 지금 기성세대는 앞으로의 미래세대에게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끔찍함을 도대체 뭐라 변명해야 하나. 진짜 재난은 아마 그곳에 똬리를 튼채 숨죽이고 여전히 우릴 노려 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8월 3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