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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앤-마리 “기억하세요, 당신은 아름답다는 것을”
대표곡 ‘2002’로 국내 차트 석권한 팝가수
팬데믹 후 정점 올라선 비대면 공연
자동차, 복싱 링, 라벤더 꽃밭…역동적 세트전환
2021-08-11 15:26:36 2021-08-11 18:24:02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그의 라이브를 보는 내내 다양한 이름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드루 배리모어같은 얼굴과 앨라니스 모리셋처럼 부드럽되 시원한 가창, 핑크의 당당함 그리고 저돌성...
 
가상의 빗방울을 뚫고 쏟아내는 래핑과 분홍 드레스를 입고 뻗는 발차기가 화면을 뚫고 나올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지난 8일 저녁, 영국 싱어송라이터 앤-마리가 선보인 온라인 콘서트 ‘테라피: 더 라이브 익스피리언스’는 팬데믹 이후 정점에 올라선 비대면 공연의 신경향을 보여줬다.
 
런던의 한 스튜디오를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눈 논스톱 원맨쇼. 지난달 28일 정규 2집 ‘테라피(Therapy)’를 발표한 앤-마리는 수록곡을 순서대로 다양한 시각효과들과 결합시켰다. 흡사 앨범 전곡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을 방문한 기분. 라벤더 꽃밭과 올드카,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여러 세트를 오가는 앤-마리를 스테디캠은 부드럽게 따라가며 몰입감을 높였다.
 
영국 싱어송라이터 앤-마리 비대면 공연 '테라피: 더 라이브 익스피리언스' 복싱 링 무대 세트 모습. 사진/앤-마리 공식 SNS, ⓒdumisiwo
 
“집에서 행복하게 즐기고 있나요? 빠른 시간 내에 꼭 대면으로 마주할 날이 오길 바랍니다. 아주 반갑게요! 그때까지는 이렇게 즐겨주세요.”
 
앤-마리는 TV 생중계풍 진행도 놓지 않았다. 실험적인 무대 콘셉트와 연출로 꾸며진 이날 40분 간 공연에서 그는 신곡들을 들려주며 소탈한 대화를 나눴다.
 
2013년 데뷔한 앤-마리는 영국식 전자 팝 음악으로 세계 음악 팬들의 마음을 훔친 가수다. 한국에서 인기도 뜨겁다. 에드시런과 줄리아 마이클스와 협업한 대표곡 ‘2002’는 국내 주요 음원 서비스 팝 차트를 역주행하더니, 2019년 가요를 제치고 연간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록을 썼다. 팝이 가요를 제치고 정상에 오른 것은 한국 음원 집계(가온차트) 사상 10년 만이다.
 
당시 내한 공연 차 본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로렌 힐, 앨라니스 모리셋, 핑크 같은 뮤지션들을 선망한다”고 밝혔다. 이들을 ‘강한 여성(Strong Female)’이라 통칭한 뒤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가사를 쓴다”고 했다. 이날 화면 너머 2년 만에 보고 들은 그의 음악은 꽤 닮아 있었다. 서울 광진구에서 열린 첫 내한 단독 공연에서 오른 발차기를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음색이 뇌내에서 망령처럼 살아났다.
 
영국 싱어송라이터 앤-마리가 비대면 공연 '테라피: 더 라이브 익스피리언스' 도중 올드카에 앉아 노래하고 있다. 사진/앤-마리 공식 SNS, ⓒdumisiwo

  

'너 이 X 본 적 있어? 너 이 X 본 적 있냐고?'('X2 중')
 
첫 곡, 첫 소절부터 달콤한 멜로디와 목소리로 욕설 가사를 읊는 아이러니. 이율배반적인 노랫말들은 이미지와 겹쳐져 더 모순되게 들렸다. 통유리 방을 번쩍이던 번개 후 가상의 장대비가 그의 분홍 드레스와 머리를 이내 헝클어뜨린다. 멜로디는 곧 폭풍 같은 래핑으로 번진다. 1집부터 일관된 앤-마리 음악의 묘미다.
 
두 번째 곡 ‘Don't Play’ 전주가 흐르자 앤-마리는 휴게소 콘셉트의 옆방으로 이동해 머리를 말리며 노래를 불렀다. 브라운관 TV 소품에는 래퍼 KSI가 출연, 래핑을 쏟아내며 공중 위로 흩어지는 앤-마리의 허스키한 보이스 빈틈을 메워줬다.
 
곡 ‘Kiss My (Uh Oh)’ 순서 때는 복싱 링 위로 뛰어 올라 스윙 마이크를 하늘로 치켜들고는 열창했다. 2003년 세계적인 팝 가수 루미디가 발표한 명곡 ‘Never Leave You (Uh Oh)’ 코러스를 샘플링한 곡. 2000년대 초반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R&B 팝은, 음악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2020년대의 전자 음악, 앤-마리와 리틀믹스의 허스키한 보이스와 맞물려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무대가 됐다.
 
보라색 라벤더 꽃밭으로 꾸며진 백색의 방에서 부른 ‘Who I Am’은 캐치한 멜로디가 전작을 떠올릴 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Our Song’을 부르기 전, 앤-마리가 자동차 내장 라디오를 돌려가며 직접 니얼 호란에 듀엣을 제안하는 기획은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온라인 공연의 단점을 보완한 영민한 기획이었다.
 
앤-마리 비대면 공연 '테라피: 더 라이브 익스피리언스'/앤-마리 공식 SNS, ⓒdumisiwo
 
보름달 같은 조명을 배경 삼아 멈블 랩(웅얼거리듯 흘리는 랩)과 달콤한 멜로디 가창을 오간 곡 ‘Breathing'은 그가 데뷔 후 처음 직접 쓴 러브 송이라고.
 
그는 본래 이번 앨범을 전 남자친구를 향한 독설과 분노로 꽉 채우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공연장에서 만난 한 소녀의 아버지로부터 ‘딸이 당신을 존경한다’는 말을 듣고 작업 중이던 앨범 전체의 기획을 폐기했다.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기분 좋게 해주는 음악’을 다시 썼다. 감성적인 슈몰지 신스와 일렉트로닉 비트 위로 아픈 사랑의 기억을 치유하고 회복해가는 주제가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이유다.
 
대표곡 ‘2002’에 공동으로 참여한 에드 시런이 쓴 ‘Beautiful’은 신작의 분위기가 가장 잘 집약된 곡. 아이들과 함께 마무리 후렴구를 부르며 그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외쳤다. 온갖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는 팬데믹 시대 되새겨볼 말이다. 우리 내면을 거울처럼 비춰줬다.
 
“아 유 오케이? 저도 그렇고 다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나는 지금 여기 있어서 행복하다고. 그리고 당신도 함께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모든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은 아름답다는 것을.”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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