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객 121명 전원 탑승하였습니다. 문 닫겠습니다.” 이 대사는 영화 ‘비상선언’이 모든 관객을 테러당한 비행기 안으로 몰아넣은 선언적 한마디이다.
‘비상선언’ 기자 시사회가 있던 지난 15일 칸 국제영화제 주 행사장 주변에 수상한 꾸러미가 있단 신고가 접수됐다. 이 때문에 다른 영화의 상영 시간이 40분 이상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폐막식을 하루 앞두고 경비는 삼엄해졌다. 영화제 측이 출입기자들에게 별도로 요구하던 PCR 결과지 또한 전보다 더 꼼꼼하게 체크됐다.
‘비상선언’은 테러 공격으로 인해 무조건 착륙 즉, ‘비상선언’을 선포한 비행기를 두고 벌어지는 재난영화이다. 칸 국제영화제 현지에서 ‘비상선언’의 한재림 감독을 만났다.
(좌)한재림 감독 (우) 이병헌. 사진/신혜진 특파원
‘비상선언’이 칸 국제영화제 공식 선정작이 됐다. 소감을 말해 달라.
“우리나라는 코로나 이후 편하게 극장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방역도 철저히 하고 마스크도 쓰지만 이렇게 영화를 보러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게 꿈 같다. 매일 밤 관객들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갖춰 입고 극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온 날 밤에는 충격을 받았을 정도다. 영화와 영화인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는 관객들에게 감동받았다. 감독, 배우, 스태프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환호하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을 보면서 시네마가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기자들에겐 ‘비상선언’에 대한 의견 나뉘고 있지만 일반 관객들은 압도적으로 호평 일색이다.
“우선 칸을 염두하고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닌데 초청을 받게 돼 아주 기뻤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다만 영화제 일정 때문에 급히 편집한 부분이 있어서 CG와 음악이 100%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다. 개봉하기 직전까지 밀도 높게 후반작업하면서 끝까지 붙들고 있을 것 같다. 개봉 예정일이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하반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갈라 상영회에서 한 장면 한 장면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웃음이 터졌고, 영화 중간에 박수가 터졌고, 정확히 잰 것은 아니지만 영화 끝난 후에는 기립박수가 10분 이상 이어졌다. 그렇지만 너무 현실을 연상시키는 설정과 결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올 것 같다. 이 영화는 10년 전에 기획됐다. 1차 제안 때 못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공동제작사와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코로나 이전이기 때문에 당연히 팬데믹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펜데믹 상황이 벌어졌다. 대본을 쓴 다음에 벌어지는 현실이 너무 영화 내용과 맞아떨어지니까 두려웠다. 이런 상황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현실이 허구적일 정도로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촬영하는 동안 고생했을 것 같은 장면들이 여러 부분 보였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4개월 반 동안 촬영했는데 코로나 펜데믹 상황이어서 방역에 굉장히 신경 썼다. 당시는 코로나 초반이라 방역지침이 지금처럼 꼼꼼하게 마련돼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손소독제, 마스크, 발열체크 등 기본적인 것들을 매우 신경 써서 챙겼다. 촬영 중에 승객 역할을 했던 배우들이 지금 가장 많이 생각난다.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승객이 100명 넘는 비행기가 배경이어서 승객으로 출연한 배우들이 여러 명이다. 만일 영화가 사실적으로 보였다면 이 배우들 덕분이다. 난기류 상황이라든가, 비행기가 돌아가는 장면에서 승객 한 분 한 분의 리얼한 연기가 정말 중요했다. 감독으로서 신경 쓴 장면이고 배우들이 매우 고생했던 장면이다.
주연 배우들이 중점적으로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주연 배우들 경우에는 촬영 전부터 장시간에 걸쳐 준비했다. 이번에 칸에는 동행하지 못했지만 김남길 배우가 조종사 역할인데 김포비행장으로 가서 비행이론 교육부터 받았다. 실제 조종사들이 훈련 받는 시뮬레이터에 들어가서 조종사 실습교육도 받았다. 비행기 조종이 몇 번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간단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시뮬레이터에 들어갈 때마다 번번이 추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조종사들마다 각기 다른 사소한 습관들 이를테면, 무전할 때 말투, 기기를 만지는 손놀림 같은 것을 입고 왔더라. 교육을 도와준 항공사 기장께서 촬영현장에 출근하다시피 나와 적극적으로 연출과 연기에 도움을 주셨다.”
갈라 상영회 전 ‘비상선언’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들이 티켓 양도를 원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신혜진 특파원
아까 말씀하신 대로 ‘비상선언’이 코로나 펜데믹 상황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재난 상황에서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가 관객에게 불편할 수 있지는 않을까?
“재난 상황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상에 대해 조명하고 싶었다. 나는 ‘비상선언’을 있는 그대로 ‘재난영화’로 봐주길 바란다. 장르로서의 ‘재난영화’가 아닌 ‘재난에 대한 영화’로 봐달라는 뜻이다. 테러를 해결하는 영웅의 이야기보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오로지 고통만 감수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 달라. ‘그 순간, 그 시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재난의 속성이다. 우리나라도 재난을 많이 겪은 나라 아닌가. 요즘 벌어지는 테러는 이유가 없다는 게 가장 무서운 점이다. 총기 난사 사건의 경우에는 무작위 사상자가 발생하고 범인은 자살해 버리고 끝난다. 원인도 해석도 불가능한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과 그들이 겪어야 하는 후유증이 바로 재난의 본질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결말에 따른 단순한 기분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면 좋겠다.”
프랑스 칸=신혜진 특파원 ich03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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