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우선 말 한 번 제대로 붙이기 힘든 외모다. 키 184cm, 딱 벌어진 태평양 어깨 사이즈. 하지만 그를 차가운 얼음 미남으로 만들어 버린 건 그의 생김새. 종이도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만화에서나 봤음직한 비현실적인 눈매와 얼굴 라인. 무엇보다 그를 판타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큰 몫을 하는 새하얀 피부. 그는 “그래서 심지어 900살 먹은 뱀파이어까지 해봤다”고 웃는다. 2006년 패션모델로 데뷔했다. 한때 그는 국내 남자모델 넘버원을 찍을 정도로 최정상에 서 있었다. 하지만 ‘모델 출신’이란 말이 하나의 타이틀처럼 자리했듯, 그 역시 정해진 수순처럼 배우로 전향했다. 그는 이 지점에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길 바랐다. 모델을 하다가 누구나 예상하듯 그저 정해진 대로 배우 전향을 한 게 아니다. 그는 사실 원래 처음부터 연기, 그것도 영화를 고집해 왔다. 하지만 길을 잘 몰랐다. 큰 키와 색다른 비주얼 탓에 모델로 처음 발을 내딛었다. 이후 드라마를 통해 연기를 접하게 됐지만 항상 목이 말라 있었다. 2012년 영화 ‘차형사’에서 단역으로 출연한지 무려 9년 만이다. 그는 포스터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게 됐다. 그리고 언론 인터뷰까지 하고 있다. ‘모델 출신’이란 타이틀도 이젠 필요 없다. 이수혁은 영화 ‘파이프라인’이 건져 올린 ‘준비된 예비 대어’다.
배우 이수혁. 사진/YG엔터테인먼트
이수혁은 ‘파이프라인’에서 악역이다. 거대 정유회사를 물려 받을 후계자 ‘건우’로 등장한다. ‘빌런’이란 단어로 ‘건우’를 소개하는 자료와 기사가 많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건우’를 빌런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다. 어딘가 좀 모자란 구석이 보인다. 빈틈도 많다. 그런데 또 반듯하고 재벌가 스타일의 냉철하고 냉혈한 모습도 갖추고 있다. 이수혁의 이미지 그리고 모습과 겉은 딱이다. 그는 속을 채워야 했다.
“유하 감독님이 전작에서 보여 주신 ‘악역’ 스타일로 ‘건우’를 그리려 하신 것은 절대 아니셨어요. 확고하게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으셨어요. ‘도유팀’과 대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적당한 무게감과 유쾌함을 지니고 있지만 중반 이후 무자비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비밀이 공존하는 인물이죠. 전 사실 감독님이 요구하신 대로 따라가기만 했어요. 적당히 각도 잡고 또 적당히 풀어지는 선을 지키는 게 중요한 배역이었어요.”
‘파이프라인’은 유하 감독이 데뷔 30년 만에 자신의 주특기인 남성미 강한 느와르 장르에서 범죄 오락물로 연출 스타일을 전환시킨 작품이다. 때문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기존에 얼굴이 잘 알려진 특급 스타들보단 색다름을 품고 있는 가능성이 큰 인물들을 대거 캐스팅했다. 범죄 오락물이기에 악역의 비중은 무엇보다 강렬해야 한다. 그래서 이수혁의 캐스팅과 비중은 ‘파이프라인’의 성공 열쇠이기도 했다.
배우 이수혁.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 인지도를 생각하면 유하 감독님과의 작업은 정말 행운 중에서도 특급 행운이죠. 시나리오를 보고 나선 너무도 욕심이 생겼지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근데 절 캐스팅해 주셨어요(웃음) 제 이미지가 사실 굉장히 정형화 돼 있잖아요. 근데 그걸 깨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죠. 기존 드라마에서 제가 보여드리지 못했던 말투나 표정들을 감독님이 확실하게 끄집어 내주셨어요.”
모델에서 배우로 전향한 뒤에는 운동에 집중해 피지컬 자체를 완벽하게 바꿔 버린 이수혁이다. ‘몸 좋은 남자 배우’를 꼽자면 이수혁은 언제나 항상 한 손에 꼽힐 정도다. 그렇게 평소에도 자기 관리를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 이수혁이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을 놔버리고 정말 맘 편하게 지냈단다. 배역 연구에 몰두하며 정신적으로 큰 짐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몸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하고 즐거웠다며 웃는 이수혁이다.
“모델 시절 몸이 너무 가늘어서 배우에 집중하면서부턴 좀 많이 키웠어요. 그래서 운동을 즐기는 것도 있지만 빼먹지 않고 집중하기도 하죠. 식단도 잘 지키는 데. 이번만큼은 정말 모든 걸 다 끊었어요(웃음) 먹는 것도 정말 편하게 막 먹었고. 어떤 날은 일부러 먹고 나서 바로 자기도 했어요.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어요. 그래야 ‘건우’의 악하면서도 편안한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준비한 게 도움이 됐는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제 얼굴이 저조차 낯설더라고요.”
배우 이수혁. 사진/YG엔터테인먼트
‘파이프라인’은 범죄 오락물이다. 그리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멀티 캐스팅 영화다. 영화 자체의 톤 앤 매너 역시 가벼운 스타일의 블랙코미디가 주된 정서다. 출연하는 배우들 모두 경력은 상당하지만 인지도 면에선 충무로 상업영화 조연급 정도. 누구 하나라도 이른바 ‘따먹는’ 장면에선 욕심을 낼 법도 하다. 자신의 이미지 변신과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더 없이 좋은 판이다. 하지만 이수혁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배우들 모두 그랬단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고 하면 그럴 구석이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저를 포함해 모두가 그렇게 안 했어요. 우선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요(웃음). ‘도유’란 소재를 갖고 튀기 보단 이 소재를 갖고 너무 판타지 냄새만 나는 게 아닌 현실적인 재미까지 줘야 하니 모두가 적절한 선을 지킨 것 같아요. 사실 전 뭘 튀게 하거나 내가 돋보였으면 하는 게 아닌 이 작품 안에서 오롯이 ‘배우’로만 보였으면 하는 게 더 컸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원하는 ‘건우’에 가까이 다가서려고만 집중했어요.”
영화계에선 아직까지 그리고 분명히 낯선 이수혁이다. 하지만 ‘파이프라인’이 개봉한 뒤 그는 낯익은 배우가 될 게 분명해 보인다. 이수혁이 갖고 있는 강한 ‘모델 이미지’가 이번 ‘파이프라인’을 통해 완벽하게 부셔지게 될 게 뻔하다. 그가 아니면 절대 안될 사이코틱한 캐릭터 그리고 적당히 웃기고 또 충분하게 허당기 가득한 모습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영화를 꿈꾸던 그는 이렇게 영화 중심에 자리하게 됐다.
배우 이수혁. 사진/YG엔터테인먼트
“감독님께서 처음 배우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번에는 전혀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신선한 얼굴들로 많이 캐스팅을 하셨다고 하고. 저 스스로도 분명히 감독 때문에 그리고 이 작품 때문에 몇 단계는 성장한 거 같아요. 다음에 감독님이 어떤 작품을 하시던 꼭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감독님 작품에 제가 나오는 모습을 제 눈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요. 아직 배우라고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다음 작품 정도 되면 ‘영화배우 이수혁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소개하고 싶습니다(웃음)”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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