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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비와 당신의 이야기’ 속 기억과 추억의 포근함
각자가 기억하는 ‘추억’, 기억이 ‘기억’하는 ‘추억’에 대한 이야기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가장 잊고 지낼 가능성 큰 ‘추억’에 대해
2021-04-22 00:00:01 2021-04-22 00:00:0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아날로그는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이유가 뭘까. ‘추억기억보다 아름다운 이유 때문은 아닐까. 기억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기억은 감정을 덧입히기 전 무엇이다. 그래서 그저 기억일 뿐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기억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그게 혹시 추억이라면. 추억도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추억은 각자 기억 속 자리한 감정의 굴레가 만들어 낸 아련함일 뿐이니. 하지만 아련함만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한다면 그건 기억일까 추억일까. 추억과 기억에 대한 얘기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또 누구에게나 공평한 다름을 의미한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각자가 기억하는 추억과 그 기억이 기억하는 추억에 대한 얘기처럼 다가온다. 오롯이 기억에 대한 얘기로 풀어가지만 얘기를 끌고 가는 화법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 낸다. 로맨스와 멜로 장르로 풀어내 볼 수 있지만 결이 다르고 흐름이 틀리다. 의외로 간결하고 또 예상 밖으로 군더더기가 없다. 의도치 않게 엇갈리고 또 다른 곳을 바라보며 결과적으로 같은 곳을 보고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연출 방식이 기억을 추억으로 자연스럽게 치환시키는 힘을 만들어 낸다.
 
 
 
12 31, 1년의 마지막 날. 가장 춥고 또 가장 따뜻한 날. 그 날에 비가 올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기대하고 또 기다리는 한 남자. 20대의 영호(강하늘)는 그걸 기다린다. 초등학교 시절 기억 때문이다. 기억은 기억으로 그를 자라게 했고, 기억은 이제 추억으로 그를 살아가게 만들어 놨다. 영호는 추억을 되새기며 기억을 되짚고 또 돌아본다. 설레임과 가슴 떨림이 가득하다. 사실 그것보단 기억 속에서 추억으로 위안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는 아버지, 그리고 잘났지만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형. 대학 입시에서 연이어 실패하고 삼수생으로 살아가는 자신. 희망보단 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던 영호는 그랬다.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막연히 갑자기 뜻하지 않게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다. 기억을 잊고 지냈고 추억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뿐일지 모른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같은 입시학원에서 만난 수진(강소라)의 연이은 구애도 그래서 영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 같다. 밝은 낮이 지나고 어두운 밤이 되면 밤을 비춰주는 별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지만 우리를 위로해주는 따뜻함이 아닌 찬란함으로 빛을 내고 있을 뿐이니. 영호에게 수진은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찬란함으로 날 빛나게 해주지만,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지만 기억과 추억은 공유될 수 없는 고마움이고 감사함일 뿐이니.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가까워지는 수진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래서 초등시절 그 소녀 소연이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일 수도 있었을 터. 영호는 다가오는 수진을 통해 과거의 기억 소연을 소환한다. 그리고 기억은 곧바로 추억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친한 친구를 통해 우여곡절 끝에 알아 낸 소연의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낯설기만 한 편지지 위에 ‘To. 소연에게를 시작으로 영화는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추억으로 끌어가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편지를 받은 소연의 동생 소희(천우희)는 낯설기만 한 편지 한 통에서 역시 추억을 느끼고 그 추억에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 놓는다. 이제 영호와 소희는 기억을 공유하고 추억을 함께 하는 서로에게 위로 같은 존재로 이어진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너무도 보편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이란 표현은 반대로 가장 잊고 지낼 가능성이 큰 기억에 대한 다른 말이 된다. 기억은 과거이고 흘러간 옛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린다고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바로 추억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그래서 흘러간 옛 것을 돌아오게 하는 마법 같은 추억이 여러 곳에 깃들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청군 백군그리고 2G 아날로그 최신형 휴대폰’, 여기에 헌책방과 LP판 등 여러 영화적 장치로 치환 가능한 스토리 오브제를 끌어 온다. 홍콩 영화의 상징이자 1990년대 영화계 아이콘 장국영의 죽음도 등장하면서 기억을 소환하고 추억을 자극한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단순하게 기억을 끌어오고 추억을 자극하는 것만은 아니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기억을 끄집어 내고 그 기억 속에 자리한 추억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영화적으로 유려하게 풀어간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던 영호가 선택한 방식은 나와 당신과 우리가 두려워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영호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던 대리만족은 쾌감이 아닌 아련한 입가의 미소처럼 번져가는 게 그런 이유는 아닐까 싶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여러 영화에서 강하고 뚜렷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주로 소화해 온 천우희가 그려낸 소희는 그래서 더욱 더 만족스럽다. 그의 얼굴에서 보여지는 기다림의 시간, 흩날리는 그의 머리 결에서 느껴지는 기억의 흐름, 그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추억의 결은 나와 당신과 우리를 모두 과거로 이끌어 가는 힘이다. 천우희의 순수한 설렘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모습이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오롯이 담겨 있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영호와 소희, 그리고 강하늘과 천우희. 전혀 다른 캐릭터와 배우가 가장 비슷하고 또 어울리게 만났다. 기억이란 높다란 탑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추억의 포근한 내음이 너무 반갑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처럼. 오는 28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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