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누군가에게 발견돼야 만 의미와 존재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것.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꼭 발견해 주길 바라는 것. 영화 ‘암모나이트’ 속 화석이란 소재는 사랑이란 감정과 이처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영화 속 두 여성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그저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만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은 느닷없는 감정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것 같다. 의아스러울 정도로 서로에게 빠져 들었던 것 같다. 여성을 천대하던 시절의 억눌림도 있었으리라. 자신이 기증한 화석에 이름조차 제대로 올릴 수 없던 시절이다. 그저 돌덩이에 불과한 ‘화석’에 매달린 건 어쩌면 ‘그것 밖에 할 수 없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거기서 그렇게 그것만 하다 보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 자못 쓸쓸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바닷가 방파제가 을씨년스럽게 다가왔다. 휘몰아치는 바람만 가득한 바닷가 풍광이 싸늘했다. 그 공간에 있는 그가 너무 차가웠다. 이미 죽어 차디찬 돌덩이가 된 화석처럼 그랬다. 화석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미 자신은 죽었다. ‘암모나이트’ 속 메리 애닝(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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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 영국 남부 해변가 마을. 메리는 영국 역사에 실존했던 고생물학자다. 생계를 위해 화석을 수집해 판매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소비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던 시절이다. 재능은 남성의 몫이고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고요하다. 외치려 하지 않는다.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일 것이다. 메리는 화석이다. 화석이 메리인 것처럼. 그는 살았지만 죽어 있다. 삶의 목적도 삶의 이유도 없다. 해변가 진흙 속에 처박힌 돌멩이 속에 잠자고 있는 수백만 년 전 죽은 생물의 시체(화석)처럼 메리의 삶은 지금 그렇다. 영화 오프닝부터 이어지는 메리의 삶은 그래서 고요하고 정적이다. 그게 평화롭단 표현의 방식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폭력적이다. 일상이 그를 때리고 그를 괴롭히고 그를 학대한다. 메리의 삶은 그가 그곳에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화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영화 '암모나이트' 스틸. 사진/소니픽처스코리아
샬럿 머치슨(시얼샤 로넌)은 영국의 상류층 부인이다. 그는 남편과 함께 메리가 살고 있는 마을로 왔다. 잠시 머물러 왔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샬럿이다. 상류층의 답답하고 꽉 막힌 생활이 그를 병들게 하고 있다. 남편조차 곁을 주지 않는다. 샬럿은 혼자다. 그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로 넘쳐 난다. 하지만 그는 혼자다.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 역시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메리의 화석 가게에 들렀다. 남편은 메리의 고고학적 지식과 안목을 이용해 지질학회 입성을 노린다. 샬럿 남편의 노림수가 메리에겐 훤히 보인다. 사실 괘념치 않았다. 메리의 가게 안 가득한 화석 조각이나 메리 자신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다. 선택을 받지 못하면 화석은 그저 돌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메리 역시 자신을 선택해 줄 뭔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일 뿐이다. 샬럿 남편의 노림수는 그저 별 것 아니다.
영화 '암모나이트' 스틸. 사진/소니픽처스코리아
하지만 선택은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왔다. 샬럿의 남편은 메리에게 자신의 아내를 맡긴다. 몸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샬럿에게 화석 공부를 제안한다. 졸지에 메리는 샬럿의 화석 공부 선생님이 돼 버렸다.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메리는 선택 받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샬럿은 선택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동서양 문화권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 여성의 서사는 강요의 키워드 안에서 해석돼 왔다. 그들에게 선택의 권리는 없었다. 샬럿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와 남편의 관계도 그랬을지 모른다.
영화 '암모나이트' 스틸. 사진/소니픽처스코리아
몸의 치유를 위해 해수욕을 하던 샬럿. 하지만 그로 인해 고열에 시달리게 된다. 샬럿의 남편은 런던으로 떠난 뒤다. 샬럿의 곁에는 메리 뿐이다. 메리는 지극정성으로 샬럿을 돌본다. 샬럿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 게 아니다. 그저 샬럿이 자신의 곁에 있었기에 그랬을 뿐이다. 그리고 샬럿은 메리의 지극정성 간호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쌀쌀 맞던 메리가 달리 보이기 시작하는 샬럿이다. 그런 샬럿의 관심이 싫지 않은 메리다. 두 사람에게 서로가 이성이 아닌 동성이란 점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메리는 평생을 두고 선택 받기를 원했는데 그게 이뤄졌다. 샬럿은 평생 단 한 번도 선택해 본 적이 없는데 메리를 선택했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된 것이다. 그들은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들었다. 분명 사랑이다. 늪 같은 사랑이다. 자신이 빠져 들고 있지만 그게 늪인지도 모르고 점차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암모나이트’는 영화 ‘신의 나라’(2017년)로 전 세계 평단을 사로 잡은 바 있는 프란시스 리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메리와 샬롯, 두 실존 인물의 얘기를 그린다. 두 사람이 실제 연인 관계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감독의 상상력이 덧붙여진 스토리일 것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암모나이트’ 역시 두 여성의 사랑을 그린다. LGBTQ영화, 즉 퀴어 스토리로 볼 수도 있지만 관객들은 묘한 경험을 하게 될 듯하다.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의 얘기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을.
영화 '암모나이트' 스틸. 사진/소니픽처스코리아
‘암모나이트’와 같은 스토리를 소개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섬세함’이다. ‘암모나이트’ 역시 ‘섬세한’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이건 연출의 방식이 덧씌운 포장일 뿐이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 분량이 극도로 제한적이다.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는 카메라의 시선이고 멈춤이며 바라봄만 존재한다. 메리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이 멈추는 곳. 이후 이어진 장면은 관객들에게 메리의 시선과 그 시선이 멈춘 곳을 투영시켜 주는 카메라의 시선뿐이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샬럿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이 멈추는 곳. 이후 이어진 장면은 관객들에게 샬럿의 시선과 그 시선이 멈춘 곳을 투영시켜 주는 카메라의 시선뿐. ‘암모나이트’의 이 같은 연출은 작위적 혹은 인공적인 ‘만들어짐’의 미장센이 아닌 순수한 그 자체의 미학을 전달한다. 장면과 장면 컷과 컷 자체가 그 존재만으로도 감정을 담고 있다. 극도로 절제된 장면과 장면, 컷과 컷의 연결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의 미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메리의 눈빛이 담은 감정의 이유, 샬럿이 떨리는 숨소리와 그 숨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드레스 위로 드러난 목선과 어깨 라인. 카메라의 시선이 관능적이면서도 감정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에로틱함을 담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 모든 것을 담아 낸 포괄적인 감정이 바로 ‘섬세함’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영화 '암모나이트' 스틸. 사진/소니픽처스코리아
포괄적 감정의 섬세함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면 메리와 샬럿 두 사람이 오롯이 느끼는 감정의 격렬함에만 집중한 연출과 카메라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 들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두 사람의 사랑이 극단적으로 지루하고 고루하다면 보편성이란 통념에서 해석돼야만 옳다고 믿는 선입견의 두터운 두께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암모나이트’가 단순히 미학적 미장센만을 전면에 드러내고자 힘을 준 영화가 아닌 점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메리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단 점과, 샬럿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란 점이 너무도 공감됐단 그 한 가지다. 개봉은 오는 11일.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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