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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여론이라는 광기, 다스릴 때
2019-10-16 06:00:00 2019-10-16 06:00:00
1996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올림픽 100주년으로 모두가 들떴던 그 때, 경기장 근처 공원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한다. 수만명의 인파가 현장을 찾은 상황에서 이 폭발로 인해 2명이 숨지고 111명이 부상당했다. 보안요원 리처드 주얼이 파이프 폭탄이 든 가방을 의심스럽게 여겨 경찰에 신고해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수백명 이상으로 늘어났을 일이다.
 
하지만, 조사를 시작한 FBI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국제테러단체가 아닌 주얼을 지목했다. 한순간에 영웅은 극악무도한 테러범으로 바뀌었고, 언론에서 주얼이 경찰이 되고자 자작극을 펼쳤다고 보도하자 모두들 주얼을 범인으로 몰아갔다. 이어 여론을 앞세운 보도로 주얼의 모든 사생활이 파헤쳐지고 주얼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그해 10월 무혐의로 풀려나고 2005년 진범이 잡혔다. FBI를 비롯한 정부기관의 뒤늦은 사과는 아무것도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했고, 이미 인생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후였다. 주얼은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이기는 것도 보지 못한 채 그간의 스트레스로 건강이 나빠져 2007년 44세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얘기한다. 이는 소문이 되고, 소문은 여론이 된다. 그리고 다시 개인은 여론 뒤에 숨어 여론을 핑계로 재가공하고 이를 유포한다. 또 언론은 여기에 기생해 선정적인 기사를 생산해 클릭 수를 높인다. 참으로 나쁜 순환구조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수역 폭행 사건, 240번 버스기사 사건, 교보문고 푸드코트 화상 사고, 채선당 임신부 사건 등 다들 지나고 나서 ‘알고보니’라고 넘기기엔 당사자는 심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물질적 피해는 물론이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우울증, 자살 충동을 겪기도 한다. 공간을 제공한 포탈도, 올린 사람도, 퍼나른 사람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이게 어찌 온라인만의 문제일까. ‘일부’ 악플러들만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고, 나머지 선한 네티즌들은 이용만 당한 피해자인가. 온라인 특성상 익명성에 기대 조금 더 확산될 수는 있어도 기본적인 순환구조는 오프라인이나 똑같다. 우리는 이미 남을 씹고, 함부로 대하며, 말을 만들고, 서슴없이 공격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여론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누가 살이 쪘고, 누군가에겐 얼굴이 크다고, 누군가에겐 다리가 짧다고, 누구는 몸매가 별로라는 등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한 정치인은 입술이 얇다는 이유로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얘기까지 돌아다녔다. 한국사회에서 ‘얼평(얼굴평가)’은 기본 미덕이다. 이미 우리 사이에 이상적 기준을 정해놓은 후에 그거에 맞지 않으면 망설임 없이 튀는 사람을 제거하려고 한다. 
 
어린이에겐 부모의 재력을 기준으로, 학생에겐 성적으로, 청년에겐 취업 유무로, 직장인에겐 연봉으로, 노인에겐 자녀의 출세로 서로를 재단한다. 미혼자에겐 모태솔로부터 연애빈도까지 평가하고, 기혼자에겐 자녀계획에 심지어 부부관계까지 간섭한다. 어떤 집단에서 말하는 ‘솔직히 말하면’은 솔직이라기보단 천박한 폭력이다.
 
요즘 우리 사이에 광기를 또다시 목격했다. 떠나간 이의 이름을 다시 되내이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다. 타인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고, 의견이 있다면 이를 합리적인 절차를 밟아 이성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게 내 개성과 취향을 지키는 길이다. 이제 여론의 광기를 다스릴 차례다.
 
박용준 공동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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