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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전유진 여성기술랩 대표 "장인·기술자 즐비한 을지로…동네 외관만으로 개발 판단해선 안 돼"
"재개발 결정, 서울시 '다시세운 프로젝트'와 괴리" 지적…고유의 제작문화 가치 강조
"시제품 최적화 지역…보존하면 4차산업혁명 기지 될 수 있다"
2019-02-15 06:00:00 2019-02-19 18:19:25
[뉴스토마토 강명연 기자] 최근 세운상가를 비롯한 을지로 일대가 개발과 보존의 가치를 두고 몸살을 앓고 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일대를 창의제조산업 기지로 만들겠다며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정작 세운상가 양 옆에서는 수십년에 걸쳐 축적된 제조 생태계를 허무는 재개발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주변지역 철거 소식에 서울시 재생사업에 적극 동참했던 청년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수 많은 가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다품종 소량생산에 가장 적합한 지역적 특성을 제대로 고려했다면 애초에 세운상가와 대림상가 등 대형 상가건물을 제외한 주변지역 재개발 방식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게 지역에 자리잡은 청년들의 생각이다.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의 '상상력발전소' 사업을 통해 2016년부터 세운상가 장인들과 협업을 진행해온 전유진 여성을 위한 오픈기술랩 대표는 2017년 9월 서울시가 세운상가 내에 조성한 '세운메이커스큐브'에 입주해 활동하고 있다. 전 대표는 "서울시는 청년들을 끌어들여 도심재생을 홍보했다. 우리도 일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지역에 기여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개발 얘기가 나오니 다리가 꺾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13일 전 대표를 만나 을지로 일대 산업 생태계가 젊은 예술인과 창작자들에게 갖는 의미와 서울시 행정의 문제점에 대해 들어봤다.
 
13일 서울 중구 세운상가 내 '세운메이커스큐브'에서 만난 전유진 여성을 위한 오픈기술랩 대표는 "서울시가 청년들을 끌어들여 도심재생을 홍보하고는 갑자기 개발을 서두르니 다리가 꺾이는 기분"이라며 서울시의 개발정책을 지적했다. 사진/강명연 기자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기술을 적용한 미술장르인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공연이나 전시에 필요한 장치나 디바이스를 개발해서 만든다. 창작 과정에서 연구한 기술을 학생들에게 교육하기도 한다. 서울시가 마련해준 공간에 저렴하게 입주하면서부터는 '여성을 위한 오픈기술랩'을 만들고 지역에 기여하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오랫동안 을지로를 오가면서 도움받은 부분도 많지만 남성 중심 문화에서 비롯된 불친절 등 여성에게 특히 어려운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입주할 때부터 선언적 의미의 모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성 중심적인 지역이지만 여성기술랩을 통해 여성들에게 기술 문화에 대한 생각이나 연구결과 강연 등 대안적인 이야기를 통해 문화적인 공간을 만들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역 상인들과 어떤 협업을 해왔나.
 
협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넓게 볼 때 많은 예술가들과 창작자, 제조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이 지역에서 재료를 사고 가공을 한다. 예술작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인 만큼 기술을 접목한 예술분야 역시 기계나 장치를 만들 일이 많은데 이런 소규모 제작을 하기 적합한 지역이다. 재료의 경우도 모터, 스프링, 베어링에서부터 목재, 아크릴, 금속가공 등 많은 재료를 구할 수 있고 가공까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협업이라고 보면 입주 전부터 이 지역을 자주 왔고 장인, 기술자들의 덕을 많이 봤다.
 
좁은 의미에서 작품을 같이 기획하고 만든 것은 2016년 서울문화재단의 상상력발전소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당시 재단은 세운상가에 있는 장인들과의 협업을 전제로 한 작업을 제안했다. 이천일 장인과 평생 백남준 선생의 테크니션(기술자)을 했던 이정성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현재까지 프로젝트와 협업을 계속 진행하며 관계를 맺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에서 짝을 지어줬지만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 많기 때문에 계속 연을 맺고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입주까지 하게 됐다.
 
서울시의 '다시세운 프로젝트'와 세운상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개발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서울시가 어떤 목적으로 다른 성격의 행정을 벌이고 있다고 보는지.
 
우리도 이런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다시세운 재생사업을 통해 서울시가 지역이 가진 가능성을 보고 같은 시각을 가진 젊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을 입주시켜 활동하도록 장려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재생과는 거리가 먼 철거라는 방식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철거가 진행 중인 세운3구역에 대해 서울시는 2014년에 결정된 사안이라고 얘기한다. 갑작스러운 재개발이 아니라는 건데, 지역에 뿌리내린 청년들이 볼 때 개발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재생사업이 지역 전체를 고려한 사업이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보여주기식 아니었냐는 비판적인 생각에 이르게 된다.
 
세운상가를 비롯한 대형상가 주변 지역이 사라지면 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큰지.
 
상식적으로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문제다. 기술자들이 들어선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오면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오래된 공구거리를 쉽게 없애버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이곳이 가진 보이지 않는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아래에서 앞으로 더 쉽게 개발 논리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높다. 산업적으로도 유기적인 고리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여기서는 한 공정을 하고 다른 곳에서 다른 공정, 이후 가공과 도색 등이 이어지는 데 한 축이 사라지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서울시와 정부가 이 일대를 4차 산업혁명의 기지로 만들겠다는 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시가 정말 도심 제조산업 기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의문이 들지만 처음에는 일정부분 동의하는 측면이 있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아직 먼 미래의 얘기 같지만 산업적 변화 흐름을 읽어볼 때 시제품 제작에 강한 지역의 잠재성은 높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좁은 지역에서 다양한 재료와 기술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완성에 이르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네트워크 역시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제품 구매의 경우 인터넷 구매가 많아졌지만 실제 만져보거나 느낌을 알 수 없고, 10원, 100원짜리 제품을 한 두개씩 구매할 수도 없기 때문에 아직도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수준의 소비가 지역에 얼마나 기여하느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제작문화 관점에서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새로운 시도를 금방 실현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이 지역은 의미가 있다. 단순히 전통 혹은 산업적 가치 한 부분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서울시가 홍보한 것처럼 말 그대로 4차 산업혁명의 기지의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키워야 하는데 시작 단계에서 개발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김이 빠진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면 재검토를 언급했다. 재개발 움직임을 멈추고 지역의 가치를 돌아볼 수 있을까.
 
언론이 '전면 재검토' 타이틀로 도배를 하면서 오히려 관심을 환기할 동력을 잃었다. 보도로 인해 재검토되나보다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과 다르다. 이미 철거된 부분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이미 시행사가 있는 상황에서 대안이 없지 않나 답답하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최선을 다해서 막을 수 있는 부분을 조치해야하는데 여전히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가 미리 알았다면 당사자인 세입자와 입주 청년들에게 알렸어야 한다. 하지만 열악한 현재 국내법상 세입자 권리가 열악해 세입자들에게 개발 계획을 미리 알릴 의무가 없다고 한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선에서 진행돼온 일이어서 더욱 급박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는데, 꼭 알아야 할 사람들이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는 서울시가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본다.
 
개발이 계속 진행돼도 여기에 계속 머무를 것인가.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예술적인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노력을 하게될 것 같다. 여전히 동네 외관을 비롯한 겉모습만으로 판단해 개발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고, 서울시도 이런 식의 개발을 방치해놓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올해도 관련 포럼이나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작년에는 과거 80년대 오락기에 들어가던 사운드칩을 활용해 지역 특성을 보여주는 악기를 만들기도 했다. 기술 개발로 인해 얻는 혜택도 많지만 이로 인해 생기는 인간관계와 소외에서 비롯되는 문제,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 관심분야를 작품에 반영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예술하는 입장에서 직접적인 주장보다는 재미있는 작품을 통해 얘기할 때 의미를 더욱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이커스큐브의 경우 계약기간이 있다. 1년 정도 연장할 수 있는데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연장은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런 개발이 계속 확대된다면 계속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메이커들 입장에서도 서울 중심지여서 교통의 요지라는 것 말고는 기존의 가치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해질 것이고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청년들이 이 지역에 머무를 수도 없을 것이다.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청 앞에서 열린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반대 총궐기 대회에서 전유진 대표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강명연 기자
 
강명연 기자 unsaid@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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