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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 ‘국가부도의 날’을 바라 본 세 개의 시선
2018-11-22 00:00:00 2018-11-22 00: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얼마 전 한 TV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패널의 발언이다. 그는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살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이른바 헬조선논란을 일축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단다. 우리는 언제나 속에서 살아왔고 그래왔다고. 결국 그 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관점의 문제란 얘기다. 그럼 그 문제인 관점을 파악해 보자. 아니 관점 이전에 우리에게 문제가 있단 것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시작이 되는 셈이다. 문제,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포인트다.
 
 
 
도발적인 제목의 국가부도의 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그 날로 시계를 돌린다. 그 당시 이전을 추억해 보자. 평생 직장이란 말이 있었다. 차곡차곡 저축해 집을 장만할 꿈을 꾸며 살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TV에서 방송되던 주택복권 1등 당첨금 ‘1으로 인생 역전의 꿈을 꿨다. 그 시절 돈은 가치 판단의 기준점에서 2018년 현재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없는 사람에게 꿈이 될 수도 있던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졌다. 이상이 사라졌고, 목표가 사라졌고 급기야 현실이 사라져 버렸다. 1997년 외환위기, 우리에겐 ‘IMF’로 기억된 국가부도의 날이 왔다. 영화에선 실제 외환위기 당시 국내에 입국했던 IMF 총재 미셀 캉드쉬를 연상케 하는 ‘IMF총재가 등장한다. 그의 굴욕적인 협상 목록은 2000년 이후 대한민국 경제사의 기조가 된 내용들이다. 비정규직 양산, 종금사 일제 정리, 가계 부채 폭탄 등. 영화 속에도 등장한 이 내용은 실제 IMF가 당시 우리 정부에 내건 실제 조건이란다.
 
영화에서도 이 불합리한 조건을 예견하고 IMF로 가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유일하게 외환위기를 감지하고 끊임없이 이를 경고했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그는 유일하게 이 위기를 막을 수 있단 신념을 갖고 대처한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그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본다. 그 가운데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 국가는 바로 국민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선 세 개의 축이 혼재한다. 국가 위기를 감지하고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정부 측, 그리고 이 위기 속에서 기회의 틈을 노리고 성장의 발판을 놓는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이들은 민감한 경제 흐름의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린다. 무엇이 더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지에 대한. 이들 두 가지의 축을 제외한 나머지 하나가 바로 부도를 맞는 국가국민이다. 그들에겐 정보가 없다. 정보 즉, 사실을 차단 당한 채 거짓에 농락당한다. 농락 당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국민은 나아가 국가는 모든 것을 잃고 전복 당한다. 실체가 없지만 실재한 괴물에게.
 
영화에선 국민을 대변한 갑수(허준호) 캐릭터는 그래서 뼈아프고 고통스럽다. 뒤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그 역시 정보의 한 켠에 발을 들이 밀 수 있던 기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소시민의 위치에서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으로서 옳은 신념을 쫓고 있었다. 그저 가족을 지키고 현재를 지켜가기 위한 매 순간 선택의 판단을 강요 당하면서도 그는 그것을 그렇게 지켜온 것이다. 현재의 30대 이하가 이 시절 고통을 피부로 느끼지 못해 온 것은 어찌 보면 그래서 당연하다. 갑수처럼 최악의 고통으로 기억된 외환위기풍랑을 온 몸으로 오롯이 받아 내 버텨 온 부모 세대의 감내 때문인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그렇게 국가부도의 날속에서 위기의 감내는 지금의 부모 세대들의 몫이었다. 그 위기는 위기가 아닌 생사의 문제였다. 그들은 무너지는 순간 속에서도 자신을 돌볼 여력보단 가족을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면 한강대교 위 투신 자살을 하던 이름 모를 한 남자를 쳐다 보던 한시현의 처연한 그 눈빛이 가장이란 이름이 짊어진 그 시절 고통의 무게를 대변하는 듯했다.
 
영화는 실재했던 사건을 다루고 있기에 건조하다. 국가(정부)가 국가(국민)를 버린 희대의 망조(부도)가 정면으로 그려졌지만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아니 감정은 혼재하고 뜨겁지만 건조하고 말라있다. 경제를 두고 살아 숨쉬는 생물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들의 말도 있기에 숨결이 느껴지고 생명의 징후인 뜨거움이 느껴질 법도 하지만 무미하고 건조할 뿐이다. 이는 현상에 집중하고 문제를 반추하며 복기해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고,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지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왜 선택을 통해 안정된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 삶과 선택이 동시에 이율배반적으로 주체인 사람을 외면하는 지금의 시대가 진실인 것처럼 존재하는 지를.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그 무미하고 건조하지만 동시에 통렬한 아픔을 전달했던 시대의 괴물은 김혜수와 조우진 그리고 허준호 세 사람의 얼굴을 통해 강렬하게 그려진다. 영화 속 그들의 얼굴이 국가부도의 날이었던 1997년 그날의 인장이 됐다. 김혜수는 한국 영화에서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한시현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어디서 여자가!”란 대사보다 남자 부하 직원이 무릎을 꿇고 대령한 구두를 당연하다는 듯 신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김혜수이기에 납득이 되고 고개가 끄덕여 진다.
 
재정국 차관역의 조우진은 영화 내부자들조상무와 드라마 도깨비김비서를 섞은 묘한 아우라를 드러낸다. 반박자 느리고 때론 빠른 호흡의 대사, 기괴한 포인트에서 끊어 치는 음절은 조우진의 명확한 보이스톤과 뒤섞여 희대의 악인을 만들어 냈다. 사실은 재정국 차관이 악인이라기 보단 시대와 권력이 만들어 낸 에 희석된 인물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그의 논리 역시 절반은 틀리지만 그 절반이 결코 틀리다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허준호가 연기한 한갑수. 기존 출연작에서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을 선보여 온 그는 1997년 외환위기 속 국가이며 국민인 그 자체로 등장한다. 깊게 파인 주름과 눈빛으로 말하는 희망의 언저리는 뒤이어 드리워진 절망의 나락을 그 시절 부모 세대가 어떻게 온 몸으로 버티고 견뎌 냈는지 말한다. 버틸 수 있어서 버틴 게 아닌 버텨야 하기에 버텨왔던 그 시절 부모 세대의 모습 그대로다.
 
영화 마지막 등장하는 에필로그가 사족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패배와 아픔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반추와 복기 그리고 극복으로 이어질 수 있단 희망의 여지를 끌어냈단 점에서 기능적인 에필로그이자 마무리의 교본으로 볼만 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이처럼 영화적일 수 없는 실재를 이토록 영화적으로 끌어 낸 최국희 감독의 기량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가치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개봉은 오는 28.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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