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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5화)투기의 나날들
“군산 제이 부자는 / 일제 미두상 심부름꾼으로 부자 되고”
2018-04-09 08:00:00 2018-04-09 08:00:00
최근 몇 년 사이 인류에게 벌어진 일들 중 획기적인 한 사건을 꼽으라면 컴퓨터를 활용한 블록체인 기술과 이를 기반으로 한 암호화폐의 등장일 것이다. 2009년 처음 도입된 이래 ‘혁신’으로 주목받던 최초의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투기수단으로 변질되어 작년 국내에 열병처럼 번지자 정부는 규제책을 발표했고 이에 대한 투자자들의 반발은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2017년 대한민국을 휩쓴 비트코인 광풍은 이 가상화폐가 고안될 때 바탕이 된 철학이나 이상을 공유해서라기보다 월급으로 살기 힘든 현실을 쉽게 벗어나고픈 투기 심리가 확산된 탓이라 볼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5간담회실에서 열린 '가상화폐,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세계주요국의 규제 사례 분석 세미나 모습. 사진/뉴시스
 
혁신과 투자, 투자와 투기 사이
2017년 12월28일 정부가 거래 실명제 실시와 거래소 폐쇄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가상화폐 규제책을 발표하자,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비트코인 가격이 급락하고 다른 가상화폐들의 가격 하락을 불러왔으며 뉴욕의 증권거래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비트코인 가격을 1600% 급등시킨 주역이 한국의 투자자들로, 이들이 비트코인 거래량의 12% 이상을 차지하고 이더리움과 리플 등 다른 가상화폐의 가격 상승에도 현저히 기여했다고 한다. 2016년 말 1000달러 수준이던 비트코인 가격이 2017년 12월17일 1만9783달러로 올라 최고치를 찍었을 때도 한국 투자자들 덕분이었으니, 한국 정부의 규제책 발표가 전 세계 비트코인 가격의 하락을 불러온 현상이 놀라울 것도 없다.
 
디지털 암호화를 이용한 화폐시스템인 암호화폐의 기원은 1990년대 초 등장한 사이퍼펑크(Cypherpunk)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자상의 암호화 기술을 통해 사생활과 보안성을 확보하려 했던 이들에게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권리를 침해하는 감시와 검열에 맞서고 정부와 권력구조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지향성이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기존 금융시스템의 문제를 극복할 대안으로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의 연구자가 내놓은 비트코인 프로젝트는 이러한 지향성과 상통한다. 암호화폐의 기반인 블록체인은 미리 합의된 구조에 따라 참여자 모두가 데이터의 기록과 관리에 참여하는 공개분산장부이다. 제3의 신뢰기관 없는 완전한 P2P(peer-to-peer network, 동등계층 간 통신망) 방식의 새로운 전자화폐시스템이란, 중앙의 통제 없이, 암호화 기술을 통해 이 시스템에 참여하는 개개인 모두가 시스템의 작동을 통제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탈중심적인 사고와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식을 지향하는 철학 혹은 이상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 운용과정에서 비트코인은 마약 등 불법 물품을 거래하는 ‘실크로드’라는 웹사이트에서 유일한 지불수단으로 사용되어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비트코인 재단의 창립멤버이자 비트코인 거래회사 비트인스턴트(BitInstant)의 최고경영자였던 찰리 슈렘(1989년생)은 비트코인이 마약 익명 거래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온라인 마약거래업자에게 비트코인을 팔았다는 이유로 돈세탁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고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해, 다큐멘터리 영화 <뱅킹 온 비트코인>(Banking on Bitcoin, 2016, 감독 크리스토퍼 카누치아리)에 나온 한 인터넷기업가의 말은 인상적이다. 이 산업(암호화폐)을 일군 찰리가 한 사람에게 비트코인을 팔고 그 사람이 마약을 살 사람들에게 다시 비트코인을 팔았을 때 찰리는 감옥에 갔는데 은행가들이 세계경제를 거의 파괴해 버렸을 때는 그들 중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만)23세 청년(찰리 슈렘)은 대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감옥에 갔다, 라는 것이 그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뱅킹 온 비트코인'에 등장하는 찰리 슈렘. 사진/유튜브 캡처
 
투기의 심리
미국이 여러 해에 걸쳐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반면, 한국에 상륙한 이 ‘신문물’은 그 전후맥락에 대한 이해보다는 주식투자 식의 새로운 투자 대상 개념으로 전화되어 퍼져나갔다. 비트코인이 결제수단과 같은 본래의 용도로 사용되기보다 투기성이 농후한 투자 목적으로 거래되다보니―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도 보이는 현상이지만―블룸버그통신이 ‘그라운드 제로(핵폭탄이 터지는 지점)’라고 표현할 정도로 유독 투자 광풍에 휘말린 한국에서는 20% 이상의 프리미엄이 붙어 세계 평균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투기 열풍이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부동산 투기로 졸부가 된 사람들을 보아오면서 서민들은 정직하게 살아 번 돈으로는 평생 가야 집 한 칸 장만하기 어렵다는 박탈감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가조작으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이윤을 보고 부에 부를 거듭해 구축해가는 거물들이 빠져나간 후, 항상 뒤늦게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개미군단’이라는 비하적인 호칭을 받으며 때로는 벌겠지만 대부분은 잃게 되는, 어쩌다 올 요행을 기다리는 투자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복권을 사는 마음도 본질적으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1969년에 등장해 70~80년대(1983~1988은 올림픽복권으로 대체)를 풍미하고 90년대 즉석복권과 2000년대 로또에 밀려 2006년에 완전히 사라진 추억의 주택복권은 서민들의 소박한 희망이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원형번호판에 ‘준비하시고~ 쏘세요!’라는 사회자의 말과 함께 화살이 날아가 꽂힐 때, 일주일 동안 간직한 복권 한 장을 꺼내들고 가슴 졸이던 사람들의 설렘은 번번이 실망으로 끝나도 매주 계속 되는 일종의 작은 의례이자 일상의 위로였던 것이다.
 
로또는 매해 판매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로또복권은 하루 평균 104억원어치나 팔려 역대 가장 많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1월 오후 서울의 한 복권방에서 시민이 번호 기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미두장의 풍경
비트코인 투자 열풍이 상기시키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에 연재(1937~1938)됐던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는 군산의 미두장(米豆場)을 이렇게 묘사한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海岸通)이니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 이 대동맥 군데군데는 심장 가까이, 여러 은행들이 서로 호응하듯 옹위하고 있고, 심장 바로 전 좌우에는 중매점(仲買店)들이 전화 줄로 거미줄을 쳐 놓고 앉아 있다.”
 
이 “미두장 앞 큰길 한복판에서” 주인공 초봉의 아버지 정 주사가 “다 같은 ‘하바꾼’이로되, 나이 배 젊은 애송이한데 멱살을 당시랗게 따잡혀 가지고는 죽을 봉욕(逢辱)을 당하는”데, 그 이유는 밑천 없이 하바를 하다가 지고 나서 돈을 못냈기 때문이다. 하바꾼, 합백꾼, ‘절치기’라고도 불린 이들은 많게는 1~2원, 적게는 10~20전씩 걸고 쌀값이 오르내리는 것을 맞히는 도박꾼 즉 장외투기꾼들을 지칭하는데, 미두를 거래하는 미두꾼에서 전락해 합백꾼이 되기도 했다. 미두장 또는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거래소)는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청산거래 형식으로 사고파는 곳이었는데, 청산거래는 매매를 먼저 약정하고 나중에 현물과 대금을 주고받는 일종의 선물(先物)거래 방식이었다. 일제가 호남평야의 미곡을 수탈해 가는 거점이었던 군산의 미두장은 인천 미두시장의 분점에 해당하는 연시장(延市場, 소규모 미두시장)이었으나, 전국 9곳의 연시장 중 가장 번성했고 그러한 모습이 <탁류>에 녹아 있다.
 
군산 제일 부자는
해망동 썩은 생선 팔아서 부자 되고
군산 제이 부자는
일제 미두상 심부름꾼으로 부자 되고
군산 제삼 부자는
제 손톱 깎은 것도 내버리지 않는 구두쇠라
열 푼 들어가
반 푼 나오지 않는다
 
그중에서 그래도 좀 낫다는 게
제일 부자라
명절날에나
제 환갑날
이웃집에 떡 한 접시 돌린다
 
< … >
(‘군산 제일 부자’, 7권)
 
군산 출신으로 미두시장에서 일확천금을 이루었다가 파산한 인물이 있다. 군산에서 보통학교와 상업학교를 졸업한 김귀현은 일본인 대금업자 사이토의 집에서 금전출납을 맡아보았는데, 공금을 빼돌려 미두 거래를 하다가 사이토에게 들켰으나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또다시 큰 돈을 횡령해 미두 투기로 잃은 후 사이토에게 고백하고 한번 더 용서를 받지만, 김귀현은 스스로 물러나 군산의 합백판과 연시장을 오가다가 결국 인천 미두시장에 입성한다. 1936년 2월26일 일본 육군의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2·26사건 덕분에 거부가 된 그는 명치정 주식시장까지 진출해 명치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는 등 대성공을 거두지만, ‘칼 물고 뜀뛰기’하는 투자방식을 답습해 3년 후에는 결국 빈털터리로 돌아갔다고 한다(전봉관, <럭키경성 :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살림출판사, 2007, 133~140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전봉관씨가 쓴 책 '럭키 경성'. 조선최초의 과학적 부동산 투자의 달인 김기덕, 초호화 결혼식으로 조선을 달군 미두왕 반복창 등 일확천금을 노리는 경성 속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진/살림출판사
 
일확천금 꿈의 집결소, 미두 투기장
1896년 4월1일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미두취인소의 설립 허가를 받아 5월5일 ‘인천미두취인소’를 열었다. 명목상 목적은 미곡의 가격과 품질의 표준을 정해 미곡의 매집 경쟁에 따른 폐해를 방지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오사카도지마취인소에서 투기 거래로 파산한 일본상인들이 조선에서 재기를 꾀하고 일제가 조선의 미곡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였다.
 
처음에는 거래품목이 쌀·대두·석유·명태·방적사·금사·목면의 7가지였으나 이후 쌀과 콩으로 축소되었고 거래방법도 현물거래·선불거래·정기거래에서 실제로는 정기거래(장기청산거래)로만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조선의 중개인을 거쳐 미곡을 일본으로 수출했지만, 인천미곡취인소가 생기면서 일본상인들이 거래와 유통을 장악하게 되고 미두취인소는 투기장으로 변모한다.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먹고 살 길을 찾아 인천으로 모여든 조선의 지주들이 쌀값 변동을 예측하는 도박판에 빠져들어 땅문서를 바치고 가산을 탕진하는 동안 일본인 중매점들은 쌀값을 조작해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920∼1930년대에는 일본인이 주재하는 미두거래소와 쌀클럽(미두거래를 주선)이 합작해 개장한 미두도박소가 서울에만 43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인 중개업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뤘다가 빈털터리로 돌아간 유명한 조선인 미두꾼이 있다. 강화도 출신의 반복창(1900~1930) 또는 일본 이름 반지로로 불리는 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2세 때 부친이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반복창은 인천으로 가 아라키라는 일본인 집에 아이를 보는 하인으로 들어갔는데, 아라키는 인천미두취인소에서 중매점(선물회사에 해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14세 때 인천과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소리쳐 알리는 ‘요비코’의 역할을 거쳐, 19세 때 중매점의 시장대리인 ‘바다지’가 된 그는 ‘반지로’로 미두시장에 데뷔하게 된다.
 
오사카에서 오는 전보 시세를 조작한 아라키가 취인소에 예치한 180만원 상당의 수표를 부도내고 도망간 후, 3개월간 영업정지를 당했던 미두시장이 다시 문을 열자 반복창은 직접 미두꾼으로 나서 일 년 만에 ‘미두계의 패왕’으로 일본에까지 알려진다. 반복창은 1921년 5월 당대의 미인 김후동과 초호화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식 하객 전용 임시급행열차를 대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미두 투기로 모든 것을 잃은 그는 1939년 10월 인천의 한 허름한 네 칸짜리 움막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전봉관, 앞의 책, 49-77쪽). 예나 지금이나 투기를 하는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매순간 시세를 확인하고 매매를 반복하느라 사람답게 일상을 살 수 없다면, 언제든 전 재산을 잃어버릴 각오로 살아야 한다면, 최소한 가족은―혹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러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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