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5화)‘해골의 행진’ 국민방위군
“무성영화 화면이 좋겠다”
입력 : 2017-10-30 08:00:00 수정 : 2017-10-30 09:15:12
대한민국에서 군대 문제는 항상 뜨거운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온 방산비리, 늘 존재했으나 최근에서야 폭로되어 공관병제도의 폐지를 가져온 군 장성 부부들의 ‘갑질’ 행태, ‘국방의 의무’를 다하려고 간 군대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의문사’를 당하는 우리의 아들들, 고위공직자 부자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병역비리에 이르기까지, 문제 많은 군대의 현실은 예민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군대가 창설된 이래 역사상 군수비리가 얽힌 가장 끔찍한 비극이이라면, 한국전쟁 당시 국가에 의해 자행된 ‘간접 학살’인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지난 13일 경기 정부과천청사 방위사업청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전제국 방위사업청장이 방산비리 관련 질의를 듣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국민방위군의 소집 배경과 전개
1950년 11월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고 다시 후퇴를 하게 된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에게 예비 병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징집을 실시하게 된다. 그해 12월 에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군인·경찰·공무원·학생을 제외한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이 제2국민병인 국민방위군에 편입된 것이다. 징집된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최소 50만여 명에서 68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는 서울에 집결한 병력을 후방에 설치한 51개의 교육대로 이동시키는데, 이 수십만의 인원이 교육대가 있는 통영이나 마산, 진주, 심지어 제주까지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 속에서 몇 달씩 걸어가며 죽어나간 것이다. 이들이 혹한 속에서 식량도 군복도 방한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얼어 죽게 된 이유는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이 정부에서 지급한 예산과 식량을 횡령·착복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들
제2국민병 해당자들
무지렁이들
1만 2천5백여명
경남 진주 시내
세 국민학교에 들어찼다
교실과 교실 밖 운동장 바닥
 
사람 형용이 아니었다
거지떼
해골떼
맨발로 귀신으로 빙판길 걸어다녔다
 
무성영화 화면이 좋겠다
 
1천3백명 죽었다
거적도 없이
질질 끌어다 실어다가
언덕 아무데나 묻어버렸다
개가 파헤쳤다
 
몇천명은 환자였다
감자 한 알을
무 한 개와 바꿔먹었다
가지고 온 돈푼 다 동났다
낀 반지도
고구마 두 개와 바꿔먹었다
 
교실 바닥 가마니도 없다
깨진 유리창
막을 종이때기 없다
 
언 꽁보리밥 한 양재기
몇놈이 나눠먹었다
몇놈이 빼앗아먹었다
 
밥 달라
옷 달라 하면
깔아야 할 가마니 달라 하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피칠갑으로 나뒹굴었다
 
버젓이 식량 피복 의료약품 횡령착복했다
폐허 진주
죽음의 땅이었다
씨름꾼 출신
김윤근 사령관
대통령의 오랜 충견
 
밤마다 부산 요정에서
기생들에게 뿌리는 돈이
여기 죽음의 땅에는
한푼도 오지 않았다
 
< … >
(‘진주 풍경’, 20권)
 
거지로, 해골로 죽어간 사람들
위 시의 내용은 리영희(1929-2010) 교수의 자서전 『역정: 나의 청년시대』(1988)에 서술된 경험담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시에서 “감자 한 알을 / 무 한 개와 바꿔먹었다”는 감자 한 알, 무 한 개와 바꿔먹었다는 내용의 표현적 오류). 당시 미군 고문관의 통역장교였던 그는 진주 시내·외 학교들의 건물과 운동장에 들어찬 해골 같은 몰골의 국민방위군을 목격한다. 혹한 속에 천릿길을 걸어오느라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얼음길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지옥 같은 현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청년 리영희는 고문관을 앞세워 가마니·약품·DDT·바람을 막아줄 종이와 판자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전쟁포로보다도 적은 식량 비용으로 계산된 국민방위군 예산에는 장병들의 피복비와 의약품비도 물론 없었다. 정부가 이들의 피복비를 계산하지 않은 이유는,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수 없는데 예산은 뭣하러 배정하느냐라는 논리였다고 하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방한복 대신 이들에게는 2명당 1장씩 가마니가 지급되었다.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이 예산을 빼돌리고 군수품·보급품을 착복하면서 조작한 장부에는 병사들을 위한 젤리공장을 짓는다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운영비를 착복하고 방위군의 인원수 조작과 양곡을 속이는 등의 방식으로 총 70억 가량을 105일 동안 횡령했다.
 
한편에서 이런 횡령·착복이 이루어질 때 다른 한편에서는 굶주린 방위군 병사들이 마을로 가 먹을 것을 훔치게 된다. 당시 국민방위군에게 지급된 양곡권이란 것은 행군 도중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는데, 신성모의 국방부와 조병옥의 내무부가 양곡지급권을 두고 싸우는 바람에 양곡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제한된 주먹밥과 소금국만으로 허기를 달랠 수 없었던 국민방위군들은 마을사람들 것이라도 훔쳐 먹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음식을 주던 마을사람들도, 이가 들끓고 악취를 풍기는,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방위군 병사들을 피해 도망을 갔다고 한다. 엄동설한 속 기아와 추위, 질병으로 죽어간 국민방위군의 수는 최소 5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되고 있다(반면, 당시 군 당국은 1200여 명으로 밝혔다).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 인원이 약 30만이라 하니, 낙오자·도망자 수를 고려한다 해도 사망자 수는 그 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방위군 ‘학살’의 배후자들
고(故) 리영희 선생이 “6·25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행위”라고 표현한 국민방위군 ‘대량학살’의 주범들은 당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헌 등 방위군의 고위간부들이었으나, 그 뒤를 봐 준 것은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국민방위군 사령부의 책임은 대한청년단과 이를 기반으로 한 청년방위대에게 맡겨졌는데,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이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해 육성한 테러집단이었다. 김윤근은 대한청년단 단장 출신으로, 군대와 무관한 민간인이 하루아침에 준장으로 국민방위군사령부 사령관이 된 것이다. 윤익헌 역시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이었다.
 
LA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협의회가 연 사진전에 전시된 1950년 8월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진. 사진/뉴시스
 
해방 뒤
이승만의 돈암장에 찾아갔다
이승만의 행동대장이 되고 싶어
큰절을 열 번이나 드렸다
 
기특하군
그래
날 위해 잘해보라우
 
주먹 김윤근은 드디어 이승만의 신하이고 부하였다
지하실에 구금된
친일파 김성도도
운현궁 한독당 당본부 쳐들어가 빼내온 주먹이었다
차츰
차츰
이승만 막부의 신임이 두터웠다
 
1950년 겨울
그가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되었다
징병 적령자말고
서른살
마흔살 남자도
마구잡이 강제소집
< … >
소백산맥 너머에서도 끌려왔다
 
일주일 넘도록 굶었다
한밤중 거적 깔고 누웠다
소집된 자들
서로 원수가 되어
입은 옷 빼앗았다
신발 빼앗았다
 
김윤근 사령관은
제2국민병 방위군 예산 몽땅 삼켰다
오직 각하의 사랑이면 된다
밤마다 요정에서 마구 뿌렸다
오직 각하에의 충성이면 된다
 
탕! 왕주먹으로 상바닥을 치면 된다
(‘김윤근’, 16권)
 
사령관 김윤근을 대신해 방위군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부사령관 윤익헌에게 지급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 3억 원인데, 이는 당시 감찰위원회(현 감사원)의 1년 총예산의 30배를 능가하는 액수라 하니 가히 짐작할만한 부패이다. 신성모, 김윤근, 윤익헌과 친한 사이이던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 재판장을 맡았던 1심에서 김윤근은 무죄, 윤익헌은 징역 3년 6월이 선고된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이 들끓자, 재심에서는 이들을 비롯한 5인이 사형을 언도받아 1951년 8월 13일에 집행되었다.
 
처형된 이들이 횡령한 예산은 이승만과 정부 고위층, 국회 내 이승만 지지세력에게 정치자금으로 상납되고 군부 내 장성들에게도 제공되었다는 폭로와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들을 조사하지 않은 채 사건은 종료되었다. 5명의 처형으로 사건의 진상은 묻히고 말았지만, 이 사건이 단지 방위군 간부들의 예산횡령과 정부의 관리 부실만이 아니라는 주장, 즉 신성모가 이승만 이후 자신의 정치세력을 육성할 목적으로 대한청년단 출신들이 많은 신정동지회를 후원하기 위해 예산을 빼돌렸다, 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신성모를 “오래 전 숙종조 궁중 내시 같은 사람”이라 비유한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 … >
이 사람이
남한의 불행에 기여했다
이 사람이
북한에 기여했다
 
돌아와 삭발머리였다
영국배 타던 마도로스
영어가 능란했다
영어 능란한 사람이라
영어 능란한 대통령의 사랑을 받았다
 
일약 국방부장관이었다
 
꿈 같았다
 
전쟁 직전
점심은 평양에 가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 가서 먹는다 했다
< … >
헛소리였다
 
전쟁 직후
전선은 서울 외곽인데
라디오 방송으로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중이라 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대통령의 사랑으로
늘 큰소리였다 몇십년 만에 자국눈 오다 말았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은
더 이상 그를 장관이게 할 수 없었다
파면이었다
 
신성모
그 이름은 제1공화국의 오욕이었다
그 이름은 시대의 백치였다
그 이름은
늙은 독재자에게 필요한 교활한 환관 나리였다
그뿐이었다
(‘신성모’, 16권)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80%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몸과 정신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의 학살이 이루어졌던 국민방위군 사건의 비극적 역사로부터 두 세대 이상이 지났건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퇴역 군인 출신의 군피아(군 마피아)가 활개치고 군복무중인 젊은이들이 방탄 안 되는 방탄복을 지급받기도 한다는 사실이 한숨을 쉬게 한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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