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77화)한강의 얼음 장사
“겨울 한강 얼음 / 두자 석자짜리로 썰어 싣는다”
입력 : 2017-08-21 08:00:00 수정 : 2017-08-21 08:45:25
지구온난화가 야기한 이상기후와 더불어 매년 우리를 찾아오는 여름의 ‘폭염’이 서서히 물러가는 듯하다. 작년의 불볕더위가 가져온 현상들 중 하나가 얼음 품귀 현상이었던지라, 올해는 얼음 제조업체들이 생산량을 대폭 늘려 일찍부터 생산·비축했다고 한다. 가정용 정수기에는 제빙 기능이 필수이고, 편의점에서 판매되는 컵얼음·봉지얼음의 인기는 편의점 내 얼음시장의 규모가 연간 1000억원대로 성장했다는 보도나 작년에 판매된 편의점의 컵얼음이 약 3억개라는 보도에서도 입증된다. 한강의 얼음을 채취해 팔던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지만 얼음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최근 열대야로 편의점 야간 매출이 상승한 가운데 대구 동구 신천동 한 편의점을 찾은 시민이 얼음 음료 상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조선시대 장빙업(藏氷業)
용산구의 서빙고동, 동빙고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였던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에서 연유한다. 한강의 북쪽 연안에 설치되어 있던 이 얼음 창고들은 목(木)빙고였던 탓에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태조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동빙고는 원래 옥수동에 있다가 연산군 시절 그가 옥수동을 사냥터로 정하는 바람에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선시대 내내 사용되었다. 1동 뿐인 동빙고의 얼음은 궁궐로 운반되어 나라의 제사나 수라간 음식의 보관에 사용되었고, 8동으로 구성된 서빙고의 얼음은 고위관료들에게 배분되었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들과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지급되었다고 한다. 궁궐 안에는 내빙고가 있어 궁궐 내 얼음 사용을 관장했다.
 
장빙(藏氷)제도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권1 기이편(紀異篇) 노례왕(노례이사금 또는 유리이사금, 재위 24년~57년) 부분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오고,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지증왕(지증마립간) 6년(505)에도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국가에 의한 빙고 관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권39 잡지(雜志)8 직관(職官) 중(中)에도 “빙고전(氷庫典)은 대사(大舍)가 1명, 사(史)가 1명”이라는 서술이 있다.)
 
조선시대에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는 일은 경강민(京江民)에게 부역으로 부과되었는데, 이 부역이 장빙역(藏氷役)이고 여기에 동원된 백성과 군사들이 장빙군(藏氷軍)이다. 추위 속에 얼음을 잘라내고 운반해야 하는 장빙역이 워낙 고된 일인지라 술과 음식을 내려 장빙군을 독려한 세종과 세조, 얼음 저장하는 일을 소홀히 한 관원들을 파직한 성종 등 <조선왕조실록>도 장빙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장빙은 더 이상 국가의 관리 하에 있을 수 없게 된다.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한양 인구의 증가, 어물전·푸줏간과 빙어선(생선 운송을 위한 냉장선) 등 민간의 얼음 수요 증대는 수많은 사빙고(私氷庫)의 출현을 불러왔다. 조정은 장빙을 통제하기 위해 공인계(貢人契)인 빙계(氷契)를 조직하지만, 빙계에 의한 독점 영업권 강화는 민간 장빙업자들과의 갈등과 분쟁을 낳게 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사빙고가 큰 이익을 남기는 사업인지라 벼슬아치들, 양반들이 이 민간 장빙업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조 때 장빙업계의 대부인 강경환은 강희맹의 후손으로, 집안이 대대로 장빙업을 해 온 반호(班戶)였다. 그는 1786년 빙계인들의 독점 영업권 강화로 인해 민간 장빙업자들이 타격을 받고 반호와 빙계 사이의 동업 계약이 파기되자, 1787년 김재심을 앞세워 빙계 혁파를 주장하는 격쟁(擊錚)을 올리게 하고 자신도 상언(上言)을 올린다. 다른 반호(班戶)들도 이를 뒤따라, 결국 내빙고에 대한 얼음 공상권을 제외하고는 빙계의 장빙도고(藏氷都賈)가 혁파되어 반호 중심의 민간 장빙업자들이 얼음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강경환은 또한, ‘이씨 양반’과 모의를 해 동업 상태에 있던 빙계인들로 하여금 거금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경강민의 장빙역 대행을 포기하고 자퇴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한강 채빙 역사의 끝자락
한강은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주요한 채빙작업의 공간이었다. 1920년대는 경성천연빙주식회사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가 한강에서 매년 2~4만톤의 얼음을 채취했다고 한다. 1920~30년대 한강 채빙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신문기사들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928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혹한의 덕택으로 한강얼음 풍년, 금년 여름엔 얼음이 매우 쌀 듯, 채취에 대분망(大紛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이고, 1935년 2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는 “한강에서 채취한 천연빙 2만여톤, 금년 여름의 얼음은 염려 없다, 10일에 채빙 완료”라는 제목의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강이 오염되자 1955년부터 얼음 채취가 금지된다. 다음의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던 1950년대 후반의 한강 채빙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57년 2월 노필순
관악산 밑에서
남의 밭 농사짓다가
밭 형질 변경으로
집 들어서자 떠났다 혼자였다
 
흑석동 언덕 위 단칸집
소와 소달구지 있어
내려다보이는 한강에 갔다
 
겨울 한강 얼음
두자 석자짜리로 썰어 싣는다
꺽쇠로 끌어다가
달구지에 쌓아올려
밧줄로 동여맨다
 
남대문시장 얼음가게에 넘기면
하루가 간다
소 없는 지게꾼들도
지게에 얼음 한 덩어리씩 지고 간다
 
흑석동에서 이촌동 헛간으로 옮겼다
소와 함께 잤다
쇠똥냄새가 몸에 뱄다
< … >
 
한강으로 간다
남대문시장으로 간다
이촌동 헛간으로 돌아온다
 
드디어 갈월동에 적산가옥 샀다 부자가 되었다
식모를 두었다
2층 다다미방은 비워두었다
사글세 들일까
전세 들일까
(‘얼음부자 노필순이’, 18권)
 
한강 얼음의 채취와 식용 사용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얼음이 여전히 불법으로 유통되자 정부는 1957년 모든 얼음 공장의 식용 얼음을 색소로 물들이라는 희한한 지시를 내리게 된다. 한강 얼음과 구분하기 위함이었는데, 노란색으로 물들인 공장의 얼음은 식용으로서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났고 한강의 얼음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유통되었다. 앞의 시에서 보이듯, 이 시기 부지런한 한강의 얼음장사꾼은 조선시대의 장빙업자들처럼 부자가 될 수 있었던 환경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한강에 얼음이 얼어있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한 겨울 광진구 뚝섬한강공원에 얼음이 얼어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산중의 와해빙소(瓦解氷銷), 세속의 결빙
옛 조상들은 얼음을 잘 보관하기 위해 얼음을 빙고에 넣을 때와 빙고 문을 열 때 두 번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북방의 신 현명씨(玄冥氏)에게 지내는 이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고 나서야 한강의 얼음을 떠내고 춘분에도 사한개빙제를 지낸 후에야 얼음을 나눠주었다고 하니 귀히 여겨진 얼음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얼음의 사용이 민간으로 확산되기 전에는 왕실과 고위관료들의 향유 품목이었으니 ‘귀하디귀한’ 것이었겠다. 시대가 바뀌어 민간의 부잣집들이 냉장고의 얼음을 즐기게 되던 시기, 얼음을 그리워하는 산중의 한 모습을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디에 냉장고 같은 것이 있었던가
기껏해야
서울 필동이나
장충동
가회동쯤의 식민지시대 이래 부자동네에나
냉장고가 있기 시작했다
 
하물며 경북 청도 운문사
그 산중에야
무슨 냉장고 귀신이 있었던가
 
그런데 젊은 사미니들 소녀행자들
그 이승(尼僧) 대중 3백명 거의가
몸 뜨거움이야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한여름 얼음 한덩이 아작아작 씹어넘기고 싶었다
얼음 먹고 싶어
< … >
 
이 갈망을 듣고
걸쭉한 사내 같은 사미니 혜관이 나섰다
지루한 버스 타고 대처에 나가
가로세로 60센티 120센티 얼음덩어리를
멍석에 말아 사왔다
 
막차 아홉시 도착인데
그 시각이면
취침시간
 
그 얼음짐을
질질 끌고
열시에 도착
그 얼음을 잘게 부수어
3백 그릇에 담아
한편 녹으며
한편 설탕 치고 나니
 
열한시
그때 종을 쳐
자다가 놀란 대중 뛰쳐나와
3백 그릇
얼음 녹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다 녹기 전에
어서들 드시지요
 
하기야
<벽암록>이 말하기를
기와가 풀리고
얼음이 녹는도다(瓦解氷消)
(‘운문사 사미니 혜관’, 13권)
 
흥미롭게도 청도는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6개의 석빙고 문화재들(경주 청도 안동 창녕 현풍 영산) 중 하나가 있는 곳이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창건된 운문사는 비구니 전문 강원(講院)이 있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하다. 동료 학인들, 행자들을 위해 얼음 덩어리를 짊어지고 와 300인 분의 얼음 간식을 공양하는 젊은 사미니(예비 비구니) 스님의 모습이 아름답다.
 
안동석빙고 장빙제 행사 때 낙동강에서 얼음 채빙을 시연하고 있는 사람들 모습. 사진/뉴시스
 
시의 마지막 연에서 고은 시인이 ‘기와가 풀리고 얼음이 녹는도다(瓦解氷消)’라고 인용한 구절 ‘와해빙소’가 실려 있는 <벽암록(碧巖綠)>은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사가 1700칙의 공안 중 100칙을 골라 송(頌)을 단 ‘설두송고(雪竇頌古)’에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가 주석을 단 책이다. ‘와해빙소’, 기와가 풀리고 눈이 녹듯, 한때는 고정적으로 보이던 형태나 형세도 어느 순간 빠르게 소멸되거나 소실된다. 그러나 일순간 사라지는 그것에 세속의 우리들은 집착하고 그것을 움켜쥐려고 애쓰며 때로는 결빙이 영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그 얼음의 형태에 스스로의 인식을 가두기도 한다.
 
고은 시인은 얼음 장사가 성행하던 1950년대 한강의 또 다른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1951년 2월이면 어림없지 / 1952년 2월이면 어림없지 // 1956년 2월 그제야 / 한강철교 밑 빙판 / 기다리고 / 기다리던 빙판 // 한강 결빙 얼음 두께 16센티 // 삼청동에서도 / 홍릉에서도/ < … > / 한남동에서도 / 겨울 강태공들이 잦춰왔다 // 얼음구멍 뚫어 / 줄낚시 세 틀 네 틀 놓았다 // 하루 내내 몸 얼어들어도 마음에 꽃 핀다 / 2주일간 / 붕어 2백 마리 잡아올려 / 원효로 붕어탕집에 넘겼다 / 강태공 방주삼 옆에서 / 한 강태공이 뇌일혈로 죽었다 // 얼마나 좋아 / 이렇게 신선놀음 빙판낚시 삼매중 / 저승 갔으니 //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다 // 쯔쯔 / 죽을 데가 없어 / 하필 한강 빙판에서 죽어 //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다 // < … > // 잡혀라 / 떡붕어 / 용산 후암동 사기꾼 방주삼 / 붕어낚시 때는 절대로 사기꾼 아니다 / 쨍그랑 깨어질 듯 언 하늘 밑”(‘한강 빙판 강태공’, 20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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