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78화)청계천 변천사
“서울에는 청계천이 꾸물꾸물 흘러간다”
입력 : 2017-08-28 08:55:05 수정 : 2017-08-28 08:55:05
박태원(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청계천을 배경으로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을 그린 ‘세태소설’로 알려져 있다. 하나의 줄거리,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이야기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삽화를 병렬적으로 배치함으로써 30년대 청계천변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통해 서민들의 삶을 단면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청계천의 역사에는 한국사회가 겪어온 시대의 변천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오늘날 청계천변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시위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면 그 역시 청계천의 흘러가는 한 역사라 하겠다.
 
 
   일본 사진가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0년대 찍은 청계천 일원의 판자촌 모습. 사진/뉴시스
 
청계천의 ‘개천(開川)' 시절
청계천 정비사업의 역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의 제3대 왕 태종 때이다. 태종은 1406년(태종 6년) 하천의 바닥을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부분적인 정비를 하다가, 1411년(태종 11년) 윤12월14일 개거도감(開渠都監)―이후 개천도감(開川都監)으로 개칭―을 설치해 본격적인 정비에 들어간다. 이듬해인 1412년 1월15일부터 2월15일까지 한성 내 하천의 물길을 정비하고 다리를 조성하는데, 지금의 청계천인 이 하천은 당시 인공적으로 하천의 물길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개천(開川)’이라 불렸다고 한다. 태종은 개천을 완성한 후 개천도감을 행랑조성도감으로 전환해 1412~1414년에 걸쳐 도성 안에 시전행랑(市廛行廊)을 조성했는데, 이는 상업통제정책의 일환이었다. 하천 정비사업으로서의 개천공사는 이 행랑의 건설과 연관되어 있었다.
 
세종 때는 지천(支川)과 세천(細川)을 정비하게 되는데, 종로 시전행랑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연결시키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수중(水中)에 수표(水標)를 세워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등 홍수 예방에 힘썼다. 세종 시기에 들어서 청계천은 도심의 생활하천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즉, 도성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유민들로 인해 도성의 인구가 급증하고, 생활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개천의 수로가 막히고 토사가 쌓이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영조는 1759년(영조 35년) 10월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1760년(영조 36년)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대대적인 준천공사를 단행한다. 이는 토사를 파내고 수로를 곧게 하고 석축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지류의 준설작업도 병행한 대역사로, 기본적으로는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공사였지만 동시에 빈민구휼책이기도 했는데, 전란 이후 일거리를 찾아 상업이 발달해가는 도성으로 들어온 농민(도시빈민)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한성부민과 시전상인등 기타 자발적 부역민을 포함한 총 20여만 명의 동원인력 중 5만여 명의 고용 장정이 이처럼 실업상태에서 구제된 빈민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년) 6~8월 다시 한 번 개천을 정비한 것으로 알려진다.
 
청계천의 빨래터
‘청계천’이라는 명칭은 북악산 남쪽과 인왕산 동쪽(청와대 서북쪽)에 위치한 현 청운동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던 ’청풍계‘, 혹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냇물이라는 뜻인 ’청풍계천(淸風溪川)‘에서 나왔다고 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4년 ‘시가지계획령’을 공포하고, 이와 더불어 경성을 대대적으로 개조·확장하려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청계천의 전면 복개(覆蓋)를 구상한다. 이는 군수물자의 빠른 수송을 위한 목적이 컸으나 재정문제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복개는 극히 일부분에 그치게 되었다.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일제강점기의 청계천은 청계천 이북의 조선인 거주 지역과 이남의 일본인 거주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민족차별의 지표가 된 북촌·남촌은 경성을 이원화시켜 도로포장·위생시설·은행·백화점 등이 발달한 화려한 남촌과 그와는 대조적인 몰락한 북촌을 낳았다. 이는 일본인 집중 거주지인 ‘마찌(町, 정)’와 조선인 집중 거주지인 ‘동(洞)’의 구분이었고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와 종로의 구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가 행한 청계천 정비는 식민지 지배기관들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했다.
 
‘청계천’은 본디 그 이름대로 ‘맑은 개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복개공사에 들어가면서 빈곤과 비위생의 상징처럼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터이자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는 30년대를 그린 <천변풍경>에서도 그러하고, 전후(戰後) 50~60년대를 묘사했을 <만인보>의 다음 시에서도 그러하다.
 
서울에는 청계천이 꾸물꾸물 흘러간다
밤에는 별무리 몰래 내려와
흘러가는 물굽이에 떠내려간다
하지만 청계천은
한낮에 살아난다
 
냇물 빨랫방망이 소리
종로로 갈까
을지로로 갈까
 
모랫바닥에 젖은 빨래 원없이 널어놓는다
오줌냄새 전
아기 처네도 넌다
시어머니 치마도 짜악 펴서 널어놓는다
그 치마 보고
아이구 살무사 같은 할망구 같으니라구
하고 욕도 퍼붓는다
< … >
 
절반짜리 드럼통 양잿물 끓여
들큰한 양잿물냄새
눈에 익고
귀에 익고
코에 익었다
 
자식도 뭣도 없이
혼자 사는 밀양 박씨 노파의 숨이 차다
담배 한 대 말아태우며 한마디 막덕담 없지 않았다
 
저년들 제 서방 빨래나 하다가 뒈질 년들
저년들 제 새끼 옷이나 만지다가 뒈질 년들
 
바람 인다
어거지로 말라가는 빨래들
날아가지 못하게 돌멩이로 눌러둔다
어 광목 서른 자짜리도 널려 있어
서울대 불문학과 학생
청계천 둑길 가며 말했다
한국의 쎄느강은 휴일이 없군
다른 학생이 말을 받았다
쎄비앙
(‘청계천 3가’, 19권)
 
청계천 빈민가 빨래터의 모습과 그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삶을 영유하는 지식인(대학생)의 관찰자적 시점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마치 1930년대 ‘모던 보이’식의 분위기가 엿보이는 듯하다. 다음의 시도 비슷한 어조로, 물리적 현실과 괴리되는 인식을 대비시켜 전후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입은 옷은 미국이었다
구호물자 바지에
염색한 미군 군복 상의
하지만
대학 불문과에서는
꿈 가득히
싸르트르
까뮈
앙드레 말로였다
겉은 미국
속은 불란서였다
 
그래서인가
서울 종로와 을지로 사이
그 긴 청계천
한국의 허드슨강이 아니라
한국의 쎄느강이었다
 
명동에도 쎄느다방 있었다
 
쎄느강은 빨래
쎄느강은 하수구
쎄느강은 참외만한 똥덩어리 떠내려갔다
쎄느강은 쓰레기장
< … >
쎄느강 기슭 관수동 쪽에서
더 내려가면
거기 청계천 4가부터
생의 절정 판자촌이 시작되었다
 
판잣집 셋방
청계피복 공순이가 살고 있다
판잣집 주인
밤에는 사근사근 친절하다가
낮에는 욕지거리 티적거리기
 
공순이 조옥자
이런 서울살이 한 달이 갔다
손가락마디 쑤셔댔다
잔업의 밤중
빙빙 돌아 쓰러졌다
풀빵 다섯 개
하루 내내 미싱 시다
밤이 좋았다
이따금 꿈속
어머니를 보았다
(‘청계천’, 17권)
 
악다구니, 욕지거리가 일상의 대화인 고단한 청계촌 빈민가 사람들의 일상은 <만인보>의 여러 시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판잣집 받치고 있는 기둥 / 기둥이기보다 막대기 // 그 막대기 행여 삭아버리면 / 판잣집 두어 채 와르르 내려앉아 / 청계천 썩은 물에 / 폭삭 잠길 터”인 “그 판잣집 끝집”은 “낮이나 / 밤이나 욕밖에 없”다(‘청계천 판잣집’, 23권).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래 / 북한 수상 박성철이” 와서 “청계천 빈민가를 보자고 했다”던 바로 그곳, “청계천 더러운 물 위 / 6가 7가 뚝방동네”에 사는 “세대주 홍씨는 / 날마다 다친 짐승으로 욕을 퍼부어”대고(‘청계천 뚝방 홍씨’, 10권), 그의 처 역시, “막일 나가 / 잔등 다쳐 / 방 안에 처박혀 있는 멧돼지 노릇” 중인 그녀의 “서방 못지않게 // 주둥이 언저리 걸쭉”하다(‘청계천 뚝방 홍씨 마누라’, 11권).
 
청계천 노동자, 노점상 그리고 복원
청계천이 복개되어 도로로 바뀌고 그 위를 삼일고가도로가 지나가던 시절, 청계천은 이른바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청계피복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되었고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학습공간이 되기도 했다.
 
누구인지 몰라도 좋아라
< … >
 
열일곱 처녀가
나이 올려
아낙네처럼 푸석푸석한 얼굴인데
누구인지 몰라도 좋아라
 
평화시장 2층
맨씨멘트 바닥
거기 20여명 모여
 
한밤중 삼국시대 역사를 공부한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한 몸
지쳤다가도
새로 눈빛 살아나는 몸
 
한밤중 노동법규를 공부한다
 
배가 고프면 주전자에 담긴
찬물 꿀꺽꿀꺽 마시고 배가 부르다
(‘청계천의 밤’, 15권)
 
청계천 복개 당시 많은 거주민들이 봉천동·신림동 등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듯이, 청계천 복개구간 복원사업이 진행되던 당시 수많은 노점상들이 철거를 당해 생계의 터전을 잃었고 심지어 목숨마저 끊는 일이 발생했다. 공권력에 의해 제압당한 3000여 노점상들은 동대문 운동장, 동묘 벼룩시장, 성동공고 근처 등으로 집단 이주했는데, 이중 900여 노점상이 이주한 동대문 운동장의 경우,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약속했던 ‘동대문 풍물시장’의 ‘세계적 풍물시장’화는 후임인 오세훈 시장이 2008년 추진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사업’에 밀려 사라지게 되고 노점상들은 또다시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다.
 
2003년 7월1일부터 2005년 9월30일까지 이루어진 청계천 복원사업은 공사 과정 중에 발굴된 조선시대 유물들을 방치하는 등 청계천의 역사적 복원을 무시하고 조경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생태 문제와 유지비 문제도 계속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은 복원 공사 이후 시민들이 찾는 휴식 공간이 됨으로써 주위 상권의 확장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가져왔고, 복원사업이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 덕분에 이명박 정권마저 탄생시켜 사상 최악의 ‘4대강 녹조 라떼 사업’의 폐해를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한편 청계광장은 그 ‘4대강 사업’의 실체를 밝히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성토장이 되고 ‘MB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이 양산한 적폐들을 규탄하는 집회 공간이 되었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청계천 노점상 관련 서울시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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