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피플)“지금도 카메라를 손에 들면 가슴이 뜁니다”
우형근 사무관 “대법원 사진사 40년, 수도승 같은 마음으로 살아”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포토제닉은 김용철·양승태 대법원장”
2016-06-29 06:00:00 2016-06-29 23:09:29
[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정년 퇴임을 꼭 일주 앞 둔 지난 24일. 우형근(60) 법원행정처 총무담당관실 사무관(대법원 사진실장)은 언제나 그래왔듯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40년을 보냈다. 여유를 부릴 만도 하건만 특유의 성실함은 변하지 않았다.
우 사무관은 대법원에서 역사와 같은 인물이다. 1976년 3월 대법원 사진실 직원으로 특채돼 그가 찍은 사진만 10만 컷이 넘는다. 그 세월동안 고 민복기 대법원장부터 양승태(68·사법연수원 2기) 대법원장까지 열명의 대법원장을 모셨다.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지휘자였죠. 순간을 포착하고 최고의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우 사무관이 이제 전설이 되어 법원을 떠난다. 29일 퇴임식이다. 그는 떠나기 전 기자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대법원장님의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사진인으로서는 마지막까지 사진을 찍는 것이 영예지요. 마음같아서는 양 대법원장님께서 지난 21일 해외순방을 떠나실 때 공항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어드리고 '다녀 오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40년간 대법원 사진실 근무를 모두 마치고 29일 정년퇴임하는 우형근 사무관. 사진/우형근 사무관
 
대법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할 때를 기억하는가.
 
1976년 3월에 대법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대법원 사진실에 들어오기 전 사진에 관심이 있어서 2년간 공부를 했다. 당시 처음 맡은 업무는 사진촬영이 아니었다. 일제시대 부터 선고돼 온 대법원 판결문 등을 마이크로필름화 하는 작업을 맡았다. 대법원 사진실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서 “대법원에 마이크로필름 기계가 들어왔는데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신 것이 계기가 됐다. 1년동안 그 업무를 하다가 군입대를 했고 복귀한 다음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촬영 업무를 했다.
 
사진과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나.
 
아버지께서(고 우영순씨) 이북이 고향(함경남도)이신데 그곳에서 사진관을 하셨다. 그러다가 저를 낳으시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유학을 하셨다. 우리나라 사진가 1세대인 셈이다. 저도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배웠다. 나름 학원도 다녔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일본 유학을 권한 사람이 절친한 고향 친구인 역도산(본명 김신락)이었다. 당시 역도산이 프로레슬러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아버지가 사진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이후 한국으로 귀국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법원 사진실에 들어오셨다. 그때가 1962년으로, 대법원 사진실이 처음 창설됐을 때다. 당시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였다. 그때 말로 ‘5.16 혁명재판소 시절’이었는데 법원행정처장이 전우영씨라고 육군 준장이었다. 군복 입고 브리핑 받던 것이 생각난다. 이후 아버지께서는 1981년 60세 되시던 해에 정년퇴임 하셨고 그 뒤를 제가 이어받았다. 우리 아들도 현재 법원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3대가 법원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일이 고되거나 그만두고 싶진 않았나.
 
대법원은 제 첫 직장이다. 예전에는 공무원이 참 어려웠다. 월급도 얼마 안 됐다. 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당시 친구들은 사우디에 가서 돈을 벌거나 일반 기업에 취업해서 참 잘 나갔다. 신용카드를 갖고 있는 그 친구들이 참 부럽기도 했다. 어려서 그랬는지 당시에는 대법원 사진실에 근무한다고 어디 가서 얘기하길 꺼렸다. 대법원이라면 판사들만 다니는 줄 알던 시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버지 때부터 찍어서 내가 잇고 있는 사진기록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해 참 열심히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대법원에 기록보존소가 생겼는데 1962년부터 지금까지 디지털로 보관 작업을 했다. 다른 어느 곳 보다도 기록이 잘 돼있고 관리가 훌륭하다. 이 부분은 참 자부심을 느낀다. 그렇게 살다보니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날도 있나보다.
 
1999년 9월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개최한 제8차 아태대법원장회의에서 윤관 당시 대법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일은 잘 해야 본전이다. 행복하거나 그런 순간은 없다. 하지만 뿌듯한 것은 사법연감 화보를 남긴 것이다. 제가 찍은 것이 1981년부터 2014년까지 총 35권이다. 그 화보들은 법원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제 사진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1999년 9월 우리 대법원에서 개최한 제8차 아태대법원장회의를 치른 것이다. 당시 윤관 대법원장 재임시절인데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맡겨 주셨다. 참석한 외국 대법원장들께 모두 앨범을 만들어 보내드렸다.
 
그동안의 사진기록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예전에는 모두 필름 작업이었다. 24장, 36장 짜리여서 여러 컷을 못 찍었다. 한장 한장을 엄청나게 공들여 찍었다. 서서히 디지털시대가 오고 엄청난 용량의 메모리카드, 하이앤드 카메라가 도입되면서 연사로 많이 찍게 됐는데, 요즘은 선별작업에 품이 많이 들어간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지금은 사진을 너무 쉽게들 생각한다. 사진촬영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예전 필름 카메라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모두 한번 쯤 할 것이다. 디지털사진 도입으로 작업하기 좋아졌지만 너무 가볍고 삭제되기 쉬운 단점이 있다. 필름 사진은 인화해서 놓으면 언제든 볼 수 있지 않나. 예전에 빛을 이용해 필름에 잔상을 입혀 인화를 해서 나오는 사진이 진짜 사진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포토샵으로 보정을 한다. 그때 그 숨결과 진실함. 그런 것이 참 그립다.
 
가장 어려운 촬영은 무엇이었나.
 
아무래도 행사 사진을 많이 찍어왔다. 그중에서도 법관 임용식은 빠른 시간 내에 한 명 한 명 찍어야 하기 때문에 촬영이 어렵다. 지금도 그런데 필름사진 시절에는 오죽 했겠나. 당시 100여명이 임용했는데 한 명 한 명 찍기가 참 벅찼다. 그래서 옆에 같이 있던 사진기자들이 필름도 갈아주고 도와줬다. 정말 진땀 뺐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땀이었다.
 
대법원 사진 시스템이 언제 디지털로 바뀌었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바뀌었다. 디지털카메라는 2002년에 도입됐는데 그 전에 필름 스캐너가 먼저 들어왔다. 필름 사진을 스캐너로 작업해서 파일로 만들었다. 필름 스캐너가 들어왔을 때부터 미리 포토샵을 배워뒀었다. 최종영 대법원장이 계실 때인데 그때 당시 김용담 법원행정처 차장(전 대법관)께서 행사 중에 사진을 CD에 담을 수 있느냐고 물어봐서 미리 공부한 포토샵기술로 최 대법원장께 사진 CD를 만들어 드렸다. 하지만 나중에 종이사진을 또 원하셔서 사진을 다시 뽑아드렸다. 그게 참 좋으셨나보다.
 
현장에서는 언론사 사진 기자들과의 경쟁이 치열하다.
 
언론사 때문에 좌천을 당한 적이 한번 있다. 1998년 윤관 대법원장 시절에 한 표창장 수여식이 있었는데 모 방송국 기자가 ENG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법원행정처에서 취재를 부탁했던 모양이다. 사진을 찍다보면 어깨싸움을 더러 하는데 그때 살짝 어깨싸움을 하다가 그 기자와 시비가 붙었다. 행사가 진행 중인데 카메라를 접고 “기자를 뭘로 보느냐”고 윽박지르더라. 대법원장이 계서서 일단 아무 말 않고 행사를 끝냈는데 당시 인사관리실장이 내 입을 막으면서 “손님한테 왜 그러느냐”면서 타박을 했다. 그 이후 일주일 있다가 사법연수원으로 보직을 옮겨서 9개월간 있었다. 나중에 윤관 대법원장이 다시 복귀시켜줬다.
 
1997년 12·12, 5·18사건 최종 선고하는 날의 대법원 풍경. 사진/대법원
 
죽을 고비도 넘긴 것으로 안다.
 
1986년 8월 김용철 대법원장 지방 초도순시 때 사고다. 그때는 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법부의 수장이 고속도로에서 큰 변을 당하실 뻔 했다. 당시 김 대법원장은 링컨콘티넨탈 차를 타고 있었는데 뒷차가 심하게 추돌했다. 다행히 김 대법원장은 괜찮았지만 뒷차 수행인원 차량은 범퍼가 크게 부서졌다. 사고원인은 과속이었다. 고속도로상에서 경찰 에스코트 차량이 너무 빨리 달렸다. 앞에 차가 많이 밀려 있었는데 약 150km로 달리다가 김 대법원장이 탄 차량 운전사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서 연쇄 추돌사고가 났다. 그때 나는 장비가 든 큰 가방을 안고 있다가 차량 앞 유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다행히 사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사고현장에서 경찰 차량을 타고 복귀해 한남동 대법원장 공관에 모여서 외부에 알리지 말자고 했었다. 초도순시 때 불상사가 나서 대법원장이 큰 변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금 30년이 지난 일이어서 얘기하지만. 지금도 김 대법원장을 뵈면 그때 일을 얘기 한다. 당시 동승했던 부장판사들 중에서 대법관도 나왔고 헌법재판관도 나왔다. 윤재식 전 대법관과, 권성 전 헌법재판관이 그분들이다.
또 한 번은 암실에서 미끄러져 고관절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1996년의 일이다. 수술을 하고 2개월 동안 출근을 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몸도 그렇지만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사진사가 다리를 못 쓰게 되면 사진사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출근해 업무를 봤지만 결국 잘 극복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같은 문명생활에서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누구든 사진을 언제 어디서든 찍을 수 있다. 책자만 봐도 글자만 있으면 안 본다. 사진이 있어야 관심을 갖는다. 사법연감 같은 두꺼운 책을 펼쳐보는 것도 처음에는 화보 때문이다. 그 이후에 자료를 찾는다. 그만큼 사진은 문명과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에게는 인생이다.
 
사진을 찍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나.
 
40여년간 대법원의 모든 순간을 찍어왔다. 하지만 지금도 사진 찍을 때면 긴장한다. 사진은 순간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카메라가 고장 날 수도 있고 플래시가 안 터질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순간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절대 소홀할 수 없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진 찍을 때의 마음은 항상 긴장하고 준비해야 하는 수도자의 마음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오직 피사체만 보인다.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지휘자다. 대법원장 사진을 찍어도 연출을 요구한다. 순간을 포착하고 최고의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사진 잘 찍는 노하우를 알려달라.
 
행사 사진을 잘 찍으려면, 대범하고 과감해야 한다. 좋은 위치를 빨리 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참석자들에게 밀려나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한다. 홍보성 사진이라면, 간단한 팁이지만 단상이나 무대에서 객석 쪽으로 찍는 것이 좋다. 인물사진은 연출도 필요하다. 경직돼 있더라도 먼저 찍고 그 다음에 박수를 유도한다. 그러면 대부분 웃는다. 사진이 잘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게 최고다. 또 하나 팁이라면 일반인들은 야외에서 많이 찍을텐데 역광을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카메라가 좋아도 어둡게 나온다. 어쩔수 없는 위치라면 반드시 플래시를 터뜨려야 한다. 응달보다는 양달이 좋다. 또 사찰이나 비석, 건물 등 구조물을 배경으로 찍을 때는 인물들을 구조물에서 앞으로 많이 나오게 해서 인물을 크게 찍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경까지 다 담을 수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인가.
 
김용철 대법원장이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계셨지만 제가 대법원장과의 인간적인 첫 교감을 갖게 해 주신 분이다. 그분은 생존해 계시는 대법원장 중 최고령이시다. 생사의 기로에도 같이 있었고, 퇴임 후에도 잊지 않고 불러서 격려해주신다. 퇴임 후에 교감이 더 커졌다. 그리고 재임 중에 참 감사했던 대법원장은 윤관 대법원장이다. 좌천된 저를 복귀시켜주셨고, 제8차 아태대법원장회의 행사를 맡겨주셨다.
 
1985년 인도 대법원장과 면담을 하는 당시 8대 유태흥 전 대법원장, 함께한 9대 김용철 전 대법원장, 10대 이일규 전 대법원장. 우측 맨 뒤에 앉은 사람이 당시 통역을 맡은 15대 양승태 현 대법원장이다. 사진/대법원
 
사진이 가장 잘 받는 인물은 누구인가.
 
자세만 보면 김용철 대법원장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또 매우 근엄하시다. 그런가 하면 지금 계시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웃으시는 모습이 최고다. 그 미소는 백만불짜리다. 양 대법원장은 참 소탈한 멋도 있다. 대법관 시절에 혼자 사진실을 직접 방문하셔서 격의 없이 사진 촬영을 부탁하셨는데 금방 끝났다. 사진이 너무 잘 나왔다. 대법원장께서도 매우 흡족해하셨고, 나중에 비서관을 통해 고마움을 표시하시기도 하셨다.
 
퇴임하면서 서운한 점은 없는가.
 
저는 마지막까지 대법원장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1년 반 전부터 동영상을 찍게됐다. 사진인으로서는 마지막까지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교체지시가 있어서 동영상을 하게 됐다. 국회 사진실 사진사들은 마지막까지 국회의장 사진을 찍고 나간다. 그게 좀 아쉽다. 양 대법원장께서도 서운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정년 퇴임할 때 되니까 사진 찍으러도 안 나온다고.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양 대법원장께서 지난 21일 카자흐스탄·러시아 방문을 떠나시는 인천공항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어 드리고 "다녀 오십시오"라는 인사를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카메라를 잡지 못했다는 게 아쉽다.
 
퇴임 후에는 어떻게 활동할 계획인가.
 
지금 거리에서 사진관을 볼 수 있나? 대형 웨딩업체나 아이들 기념사진을 찍는 곳은 기업 수준이다. 나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카메라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조용히 프리랜서로 활동할 계획이다.
 
우형근 사무관(오른쪽에 사진 찍는 이)이 2015년 대법원 영산홍 축제에서 대법관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