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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단호한 결단력은 리더의 기본 자질
2016-05-24 06:00:00 2016-05-25 08:34:40
괴테는 청록의 5월을 “반짝이는 태양, 웃음 가득한 들판, 모든 이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즐거움과 환희”로 노래했다. 그러나 한국의 5월은 우울한 역사에 짓눌려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피비린내 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어루만져줘야 할 빚 때문이리라. 올해로 36회를 맞은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은 뜻밖의 ‘불청객’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슬프고 참혹한 풍경을 역사에 남겼다.
 
국가의 기념식은 역사적 집단 사건에 대한 국가적 인식을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조직한 행사로 국가 전체가 관여한다. 고위 관료들이 참여하고 집단 기억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시민들을 결집시켜야 한다. 기념식의 정치적 전통은 불행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국가가 도덕적으로 간직하고 기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은 과연 국가의 행사인지 의구심을 자아냈고 결집보다 분열의 의미가 컸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으로 국론 분열은 심화되어 갔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넘어갔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국민이 허용하지 않는 제창은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댔지만 그 국민은 도대체 누구인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 과반수인 55.2%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식장 제창을 원했고, 26.2%만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궤변적인 결정에 박근혜 정부는 어떤 개입도 결단도 내리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에 따라 정국은 혼란스러워졌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리더의 기본 자질로 단호한 결단력을 꼽았다. 이들은 각기 고대와 중세를 산 인물이지만, 이들이 구가한 리더의 기본 자질은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통용된다. 이런 리더의 결단력이 결여된 박 대통령이 한국의 최고 통치자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프랑스는 오는 29일 제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로 알려진 베르덩(Verdun)에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벌인다. 여기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엥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함께 참석해 역사의 기억을 더듬는다. 이때 화합의 무대로 프랑스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흑인 랩가수인 블락 엠(Black M)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극우들은 블락 엠의 노래 가사가 프랑스를 반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특히 그의 피부색과 종교를 문제 삼아 격렬한 저지 운동을 벌였다.
 
극우들의 전례 없는 대규모 논쟁에 프랑스가 며칠 째 휩싸이자 결국 사회당의 사뮈엘 아자르 베르덩 시장은 지난 13일자 <레퓌블리켕 로렌> 지방지에 “우리는 증오와 인종 차별에 휩싸여 있다. 공중질서를 깨뜨릴 위험이 크므로 콘서트를 취소한다”고 백기를 들고 말았다. 베르덩 시민들은 시장의 이러한 결정을 애석해 했고, 많은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자녀가 좋아하는 블락 엠 콘서트가 취소된 것을 인종차별로 규정하고 항의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오드레이 아줄레 문화부 장관은 “베르덩 시장은 이 콘서트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 행사를 금지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를 정당화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여기에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금지에 유죄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염원한다”며 분명히 의사를 표명했다. 올랑드 대통령도 17일 아침 <유럽 1> 라디오 방송에 출현해 “국가는 블락 엠이 베르덩에서 콘서트를 열 경우 안전을 위한 대책을 강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올랑드 대통령은 베르덩의 블락 엠 콘서트 금지가 프랑스 국론을 분열시키고 심지어 인종문제로까지 확대되자 즉각 입장을 표명하고 갈등을 잠재우는 제스처를 보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으로 한국 사회가 분열로 치달았건만 모르쇠로 일관했고 기념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는 이념적 분열로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고 있다. 이런 고난의 시기에는 지도자의 단호한 결단이 통합의 열쇠가 될 수 있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구가한 리더의 기본 자질을 배양한 담대한 지도자가 하루 빨리 한국을 이끌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남은 5월을 버티고 싶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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