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통령을 뽑는 미국에서 샌더스 돌풍이 거세다. 일흔을 훌쩍 넘긴 노장이지만 전혀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게 미국 유권자들의 평가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유행가 제목처럼 버니 샌더스의 열정은 얼어붙은 동토의 시베리아 땅마저 녹일 기세다. 샌더스에게 따라 붙는 여러 수식어 중 가장 그를 잘 설명하는 표현은 ‘사회주의자’ 샌더스이다. 벌링턴 시장과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 중 하나인 버몬트주 하원의원을 거쳐 2006년 마침내 최초의 사회주의자 연방 상원의원이 되는 쾌거를 맛보았다.
샌더스는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나누어진 양당 체제 하에서 무소속으로 미국 정치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그런 그가 소속을 민주당으로 옮겨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 가장 유력했던 힐러리 클린턴과 초접전을 벌이고 있다. 당원을 대상으로한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는 간발의 차로 석패했지만 바로 이어진 뉴햄프셔주 오픈 프라이머리에서는 난공불락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네바다주 경선에서는 석패했지만 3월에 있을 ‘슈퍼 화요일’ 대전에서 각축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7선의 국회의원이자 한국 야당사의 한 획을 그었던 정치 거목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별세 전날 회고록을 탈고하며 자신의 인생 역정을 다 털어내자 온 몸의 에너지가 다한 탓일까.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4·19 의거의 화신으로 한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사자후를 토해냈던 ‘영원한 청년’ 이기택이 아니었던가. 어떤 사람들은 그의 역량에 비해 큰 정치적 족적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대통령감이었지만 미완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처럼 황량한 정치판에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이 적지 않다. 1979년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김영삼 당시 후보를 밀어 총재 자리에 앉게 한 일화는 이제 아스라이 한국 정치사의 전설이 되어 버렸다. YS에 우호적이었으나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았다. DJ에 우호적이었으나 DJP연대에 합류하지 않았다.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 이회창 전 총재에게 우호적이었으나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후원했다. 만년 야당 기질을 보인 인물이었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때는 고향(포항)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 주었다.
샌더스와 이기택.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현존하는 샌더스와 고인이 된 이기택 전 총재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소신이다. 물질 문명이 최고조로 고도화된 미국에서 사회주의자가 꿈을 펼칠 공간이 얼마나 될까. 작은 소도시 벌링턴 시장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후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가 된 지금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소신을 버리지 않고 정치를 해 나가고 있다.
‘미스터 소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이 전 총재 역시 다르지 않다. 3당 합당을 따라갔다면, DJP연대에 숟가락 하나를 얹었더라면 고행길이 아니라 비단길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웬만한 후보들이 누려본 본선 대선 후보를 보장받았을지 알길 없다. 꼬마 민주당으로 남아 있을 때에도 그의 원칙과 소신의 철학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이기택 전 총재를 YS와 DJ는 아끼고 사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신있는 두 정치인을 바라보며 또 다른 상념이 눈 앞을 스친다. 이런 두 사람을 가능하게 한 미국정치와 19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정치 말이다. 어떻게 무소속이 민주당에 들어와 이렇게 공정하고 소신 있는 경선을 치룰 수 있을까. 온갖 잡음과 갈등으로 최종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끝을 알 수 없는 갈등의 나락에 빠진 한국 정당정치와 비교하면 그 수준을 비교조차 하기 힘들다. 만약 샌더스가 한국에서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경선에 참여했다면 지금과 같은 돌풍이 털끝만큼이라도 가능했을까.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정치는 미숙했지만 정치적 도리는 있었다. 뜻을 같이 하지 않더라도 YS와 DJ는 이기택 동지를 존중하고 아꼈다. 오히려 상명하복식의 무채색이 아닌 다양한 색깔의 정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용기있게 격려해주었을 것으로 본다. 정치권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고 나라는 북한의 핵 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로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도 국회의원 선거에 모든 것을 내걸고 민생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 쓴소리를 제대로 하는 소신 있는 정치인 한명이 없다. 샌더스가 존경스럽고 이 전 총재가 그립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샌더스의 선전을 기대하고 소신이라는 정치적 유산을 주신 이 전 총재의 명복을 기원한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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