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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널리스트는 공공재, 적극 지원이 필요하다"
서석기 한국증권분석사회 사무국장
2016-02-03 06:00:00 2016-02-03 06:00:00
“증권분석사(애널리스트)는 공공재입니다. 금융 시장에 없어선 안 되는 핵심 인력이죠. 애널리스트로 대변되는 금융투자 전문 인력이 당국과 업계의 무관심 속에 소외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서석기 한국증권분석사회 사무국장은 지난 40년간 금융투자업계에서 활약하며 한국 자본시장의 변화를 지켜본 인물이다. 업계에서는 명실상부한 ‘국제통’으로 이름을 알렸다.
 
지난 1970년대 중반 제일은행 국제부에서 수출금융 실무를 담당했고, 대우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국제부에서 내공을 쌓았다. 대우증권 도쿄사무소장과 태평로 지점장을 역임한 후 2000년대 초부터는 벤처투자회사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증권분석사회에서 국제투자분석사 시험을 준비하고,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오랜 시간 업계에 머무르며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원칙과 소신은 저버리지 않았다고 그는 자부한다. 자본시장 발전에 대한 사명감에 업계와 당국을 향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서석기 국장을 서울 여의도 증권분석사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석기 한국증권분석사회 사무국장. 사진/뉴스토마토
 
-증권분석사회가 설립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금융투자업계엔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 독자들은 생소한 분야일 것 같다. 증권분석사회가 어떤 곳인지 소개해 달라.
 
우리는 증권분석사(애널리스트) 자격시험을 주관하고 있다. 지난 1976년에 설립된 이후 1700명의 증권분석사를 배출했다. 이들이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발전과 선진화에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증권분석사 시험이 지난 2002년 금융투자협회로 잠시 이관된 적도 있었지만, 2013년부터는 다시 우리 협회가 주관하기 시작했다.
 
-시험을 주관하면서부터 증권분석사 시험을 국제화하는 방향으로 개편했다고 들었다. 어떤 작업이었나.
 
증권분석사 교재와 시험에 국제공인투자분석사(CIIA) 취득 코스와 매뉴얼, 제도를 도입하는 작업이었다. 
 
CIIA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 중심으로 만들어진 분석가 자격시험이다. 지난 1998년 아시아 신흥국을 덮친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경제 운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이에 대응해 2000년 CIIA가 발족됐다.
 
현재까지 전 세계 8000명이 CIIA 자격을 취득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18명의 자격증 소지자가 배출됐다. 우리가 주관하는 국제투자분석사(K-CIIA)는 CIIA의 전 단계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K-CIIA를 취득하면, 국제적으로 공인되는 CIIA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
 
그렇다. K-CIIA 시험은 매년 3월과 9월에 진행되는데 총 3단위(3단계)로 구성된다. 1단위 시험 과목은 주식 평가 분석, 재무 분석, 기업 금융 분야다. 2단위는 경제학, 채권 평가 분석, 직무 윤리 과목으로 구성된다. 마지막으로 파생상품 평가 분석, 포트폴리오 관리 부문의 3단위 시험까지 합격하면 K-CIIA 자격증이 수여된다. 한국에서 이 자격을 취득해야 국제CIIA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이른바 비슷한 분야의 ‘라이벌’로 불리는 공인재무분석사(CFA) 시험과 비교해 보자. K-CIIA취득을 위한 공부를 했을 때 어떤 경쟁력과 강점이 있나?
 
지나치게 학문적인 접근을 피하고 최대한 실무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실무자들이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이 많다. 급변하는 금융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우리 협회의 역할이다.
 
-증권분석사회가 다시 시험을 주관하고, 재건되기 전까지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다.
 
원래는 증권분석사 시험에 합격해야 애널리스트 자격이 주어졌는데, 이 자격 요건이 자율화되면서 관심이 줄어들었다. 적자를 이유로 지난 2012년 말 폐지됐고, 지원도 끊어졌다. 이후 자격시험을 재건하기 위해 적은 인원과 재정으로 6개월 간 밤낮없이 무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서 사무국장은 과도한 업무 탓에 갑자기 쓰러졌고, 손상된 심장 판막을 회복하기 위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사명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이나 홍콩 애널리스트협회에는 정부의 지원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들 나라엔 애널리스트가 (자본시장에 없어서는 안되는) ‘공공재’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금융·자본시장의 경쟁력은 전문 인력 육성에 있는데, 이들 인력이 업계와 당국의 무관심 속에 소외되고 있어 안타깝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금융투자업계 후배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지난 40년간 증권업계 한복판에서 자본시장 발전을 이끈 분으로도 유명하시지 않나.
 
지난 1970년대 중반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 국제부에서 수출 금융 지원과 외환 관리 업무를 담당했고, 1980년 초반 대우증권 국제부로 자리를 옮겼다. 대우증권에 있을 때 황건호 전 금융투자협회장(당시 대우증권 재직)과 함께 코리아펀드를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론칭 당시 대우증권의 조사 분석 인력을 확충해 대우경제연구소와 대우투자자문회사를 만드는 일에도 기여했다.
 
-지점장으로 재직했을 때도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고 들었다.
 
대우증권 태평로지점장으로 처음 갔을 때가 기억이 난다. 일임매매(투자자가 증권사 직원에게 종목 선정과 종목별 수량, 가격, 매매 등을 전부 맡기는 것)를 원칙적으로 금지하자는 안을 내놨다. 소위 말하는 ‘뺑뺑이’를 돌려서 지점이 수수료 수입을 챙기는 일을 원천 차단하자는 내용이다.
 
내가 왜 이런 원칙을 자신있게 내세웠냐면, 예전에 일본 도쿄사무소장으로 있을 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뺑뺑이를 아예 못하게 했었다. 뺑뺑이로 손해를 본 사례가 많아서다. 미리 예상했던 일이지만, 다른 지점장이나 본부장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렇지만 당시 대우증권 기획실장으로 있던 황건호 전 회장이 나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이것이 지난 1992년 대우증권이 업계 최초로 일임매매를 전면 중단했던 ‘정도영업’(正道營業) 선포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금융투자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으로의 포부나 개인적인 목표는.
 
빠르게 변화하는 불확실한 금융 환경에서 성장하려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는 젊은 후배들의 경우 경험 많은 베테랑보다 새로운 분야에서 더 유리할 수 있다. 기존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겁 없이 도전하고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여성 전문 인력의 활약이 기대된다. 현재 우수한 여성 전문투자분석사와 운용 인력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남성에 비해 소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 많은 여성들이 CIIA 시험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현 시대는 대다수 남성에게는 없는 여성의 감성과 사고, 대응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융·자본시장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많은 여성 금융투자전문가가 탄생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 국제투자분석사 합격자 중 30대와 20대 여성 비율이 각각 11.4%, 17.4%로 높아지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일적으로는 증권분석사회의 K-CIIA가 널리 보급되는 일이 우선이다. 또 CIIA 시험 지원자가 CFA 응시자보다 많아졌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도 꿈이 있다. 지금까지는 일을 너무 좋아했으나 이제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혜진 기자 yihj072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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