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일본, 아베의 한국
2015-10-29 13:15:27 2015-10-29 13:15:27
가깝고도 먼 나라.
한일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가슴 아픈 표현이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촌 관계보다는 ‘원수’ 관계가 더 강조되는 현실이다. ‘원수’ 관계 보다는 새로운 사촌 관계를 만들 혜안은 없는 것일까.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2001년 1월 26일은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일본으로 유학 간 고 이수현 학생은 이날 오후 7시 15분경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귀가 중이었다. 신오쿠보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일본인 취객이 선로위로 추락한 것을 목격했다. 이수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철로에 뛰어들어 취객을 도왔다. 이수현이 거침없이 몸을 던지자 바로 옆에 있었던 일본인 세키네 시로도 달려들어 이수현을 거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워에 2분여 간격으로 운행하는 열차를 피하기에는 시간상 역부족이었다.
 
고귀한 희생 앞에 일본 열도는 눈시울을 적셨다. 일본 정계는 연일 고 이수현의 의로운 죽음앞에 존경을 표했다. 아사히 신문뿐만 아니라 산케이 신문까지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이수현을 대서특필하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인 취객의 위기 상황에 만약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으로만 가득차 있었다면 고 이수현의 숭고한 행동이 가능했을까. 과거사의 앙금을 씻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한일관계에서 양 국민 모두 고 이수현을 떠올릴 수는 없는 것일까.
 
한일 관계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또 한사람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이다. 과거사 반성도 없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도 없는 일본의 전 총리를 왜 떠올리느냐 물을지 모르겠지만 하토야마 유키오는 조금 다른 사람이다. 아니 일반적인 일본의 보수 우경화된 정치인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의 과거 만행에 대해 깊은 사과를 토해낸 하토야마 전 총리야 말로 우리가 기억하고 존중해야 하는 일본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50년대 일본 총리를 지냈고 외가는 세계적인 타이어 생산기업인 브리지스톤의 창업자이다.
 
아버지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70년대 외무상을 역임한 명망가 집안이다. 화려한 학력, 경력, 재력을 가진 하토야마 전 총리가 한국에 와서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를 전달한 의미는 무엇일까. 1947년생인 하토야마 총리는 엄밀히 말하면 전후세대이다. 일본의 무자비한 만행에 대해 경험해 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유명 가문에서 자라면서 일본이 저지른 온갖 악행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총리로서는 과히 성공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하토야마 전 총리야말로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가해자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과거 일제 강점기 그의 집안이 얼마나 한반도 수탈이나 위안부 문제와 연루되었는지는 알 길 없다. 정도를 막론하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가해자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 정치의 최고 정점에 올랐던 신분으로 ‘위안부 할머니들께 일본은 보상하라’는 메시지를 한국 땅에서 울려 퍼지게 한 건 박수 받을 일이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가깝고도 먼나라가 되어 버린 가장 큰 숙명은 서로를 너무 모른다는데 있다. 일본에서는 혐한류(한국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는 일본 내의 우경화된 분위기)는 넘쳐나고 있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땅에 정착한 재일동포들은 유무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땅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과거사는 짙게 드리워져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인격적이고 귀품있는 일본인을 만나게 되더라도 위안부 문제나 독도 문제를 떠올리면 욕설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리서치앤리서치가 동아일보의 의뢰를 받아 지난 5월 27~28일 실시한 조사(전국1010명 유무선RDD전화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에서 ‘과거사 문제가 매듭지어졌는지’ 물어본 결과 ‘매듭지어지지 않았다’는 응답은 95%였다. 사실상 거의 매듭지어진 부분이 없다는 인식이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일본 아사히 신문이 일본인 2147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매듭지어졌다’는 의견이 절반에 가까운 49%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과거사 인식은 천양지차로 나타났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충분히 사죄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한국인은 1%만이 그렇다고 응답했고 일본인은 65%나 충분히 사죄했다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지금 이대로는 한일관계의 미래가 없다. 박근혜 정부에서 일본은 상대 못할 우경화 집단이고 아베 내각의 한국은 과거사에 집착하여 사사건건 시비 거는 이웃으로 비쳐져서는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두 나라 국민 모두 솔직한 소통이 필요하다. 일본은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한국은 일본을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앞으로 ‘원수’로만 지내기엔 너무 가깝고 함께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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