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강제노동 희생자 넋 위로, 한·일 국가차원에서 나서야"
정병호 교수 "우리는 얼마나 노력했나 반성해야"
"양 국가 인류 보편의 가치 함께할 때 화해 가능"
입력 : 2015-09-20 16:10:59 수정 : 2015-09-20 16:45:25
"한·일 젊은이들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가 움직일 것이고 양국이 전면적으로 나설 때 그 분들은 비로소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정병호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유골 귀환 추진위원회' 공동대표(한양대 교수)는 지난 18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 유골이 무사히 안치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성당에 임시 안치됐던 유골은 20일 오전 6시 성공회 성당을 출발해 벽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을 치른 뒤 파주 서울시립제2추모공원에 영구 안치됐다.
 
정 대표는 지난 10일간 홋카이도에서 일본 주요 도시를 거쳐 부산·서울까지 3500㎞에 달하는 힘든 여정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면서도 여전히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서 유골을 갖고 서울로 오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간 슬픔과 고통을 견뎌야 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정 대표와 함께 온 유골은 일제강점기 머나먼 일본 홋카이도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이제야 고국을 찾은 조선인 115명의 유골이다.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영문도 모른 채 홋카이도로 끌려가 지옥 같은 생을 살았다. 죽음까지 타국에서 맞았지만 강제노동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연으로 숨이 졌는지, 심지어는 그들이 누구인지 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난 18년간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내 그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정 대표를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만났다.
 
정병호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유골 귀환 추진위원회' 공동대표(한양대 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에서 진행된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희생자 115인의 유골 송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용준 기자
 
-강제노동자 유골 송환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1989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에 있을 때 홋카이도를 갔다가 우연히 만난 일본인 승려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에게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도노히라 승려는 1976년부터 댐 공사 현장에서 조선인 위패를 발견, 조선인이나 한국 단체의 도움 없이 혼자서 유골을 수습하고 유족을 찾고 있었다.
잊혀져 가는 억울한 죽음을 마주한 후 비통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노히라 승려에게 반드시 이들을 고향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유골 발굴에는 혼자만의 힘이 아닌 여럿의 힘이 필요했다. 고고학·과학적 발굴을 위해 뜻 있는 사람들을 모으다 보니 1997년 한양대 교수로 부임한 후에야 100여명의 한·일 양국 젊은이·전문가들과 함께 첫 발굴을 시작했다.
 
-홋카이도 강제노역 실상은 어땠나.
 
일본 정부나 기업이 당시 기록 중 일부는 아예 없앴거나 일부는 공개하지 않아 실체 접근에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단체들이 확인한 것만 태평양전쟁 당시 국가동원체제로 홋카이도에 끌려간 조선인이 14만5000여명에 달한다. 홋카이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일본인들에게도 죄수 노동을 자행하던 땅으로 특히 조선인들은 아사지노 비행장, 우류댐 공사 등에 배치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조선인들은 바다로 사방이 갇힌 땅에서 감옥보다 심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식량이 부족하다보니 영양 부족이 일상이었고, 혹한·폭염에서도 제대로 된 의복 하나 없었다. 그렇게 하루 14~15시간 일해야만 했다.
탈출하다 붙잡히면 고문이나 무차별 폭행을 당하다 숨졌다. 과로, 추위, 질병, 배고픔으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 1944년 아사지노 육군비행장 공사현장에서는 조선인 97명이 한꺼번에 전염병으로 죽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가신 홋카이도 조선인 희생자는 확인된 분들만 2400명이다. 이번에 모셔온 유골 115구는 극히 일부다.
 
70년만의 귀향 홍보 포스터. 일제 강점기 홋카이도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을 하고 있다.사진/평화디딤돌
 
-발굴 당시 현장 상태는 어땠나.
 
발굴은 18년간 모두 7차례 진행됐다. 희생자들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발굴 과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얕은 구덩이에 3명이 뒤엉켜 매장된 곳도 있었으며, 작은 상자에 목뼈가 걸리자 목뼈를 부러뜨려 구겨 넣어 매장한 흔적도 확인했다. 혼간지 별원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유골 101구를 항아리 3개에 나눠 모두 섞어 수습에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 죽음을 보면서 함께 발굴하던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준엄한 진실 앞에 마음 깊이 눈물을 흘렸다.
 
-유족들 슬픔과 분노도 매우 클 것으로 짐작된다.
 
유족들 대부분이 희생자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것 정도만 알거나 아예 행방조차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떤 유족은 해방 이전에 유골을 전해 받았는데 나무함 안에는 신문지만 들어있었다고 한다. 한 유족은 유골 송환 절차가 지연되자 희생자 유골 중 뼈 일부와 일했던 공사 현장 흙을 몰래 가져다 선산에 모셨다고 들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유족들이 돌아가신 것이다. 발굴 초기에는 유족 대부분과 연락이 닿았지만 18년이 지나 열린 이번 장례식에 참가한 유족은 10여명에 불과하다.
 
-일본 민간단체와 주민들도 도움이 컸다고 들었다.
 
이번 송환 사업은 도노히라 승려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본 주민과 단체, 젊은이, 전문가들이 도움을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민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그를 기초로 매장 위치를 찾았다. 민간단체에서 발굴 허가를 받아내고 자료를 모아줬다.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희생자들이 조선에서 홋카이도로 끌려간 3500㎞를 되돌아오는 일정도 그분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교토의 절에서 가진 추모행사에서는 우연히 우리 행사를 발견한 한 일본인 할머니가 울면서 돈을 담은 봉투를 주셨다. 이름도 주소도 알려주지 않고 단지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그 할머니 한 분이 아니라 도쿄, 교토, 오사카 등 곳곳에서 마주친 수많은 일본인들이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에 사죄하고 연민의 정을 갖고 공감했다.
일본도 우리도 불편해야 하고,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진실을 직시하고, 화해하는 지점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아사지노 발굴현장. 아사지노 발굴은 총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던 만큼, 유해 발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사진/평화디딤돌
 
-한·일 정부에서는 어떤 지원이 있었나.
 
노무현 정부 당시 한·일 정부가 진실 규명과 유골 반환을 위한 협의에 나섰다기에 기대를 했지만, 협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우리에게 기다리라고만 했다. 시간이 흐르며 관심은 식어만 갔다. 일본 주민들과 단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나서서 추도비를 세우려 했는데 일본 우익단체들이 반대해 아직 세우지는 못하고 창고에 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광복 70주년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다행히 대한해협을 건너올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강제노동 사실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70년간 우리는 일본 정부 탓만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억울한 희생을 우리 사회가 지난 70년 동안 얼마나 진지하게 대했나. 일본 승려 한 명이 수많은 일을 할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와 동료들은 계속 사업을 하겠지만, 우리만이 해야할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젊은이들과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더 많은 양 국가 사람들이 관심 갖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사회가 변화한다면 정부가 당연히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제노동은 단순한 한·일 민족간 과거사 문제가 아니다. 군국주의에 의한 비인도적인 범죄행위로 이를 직시해야 한다. 독일 나치는 2차대전 이후 유태인과 독일인의 희생을 일상적 공간에 새겨 타 민족 뿐만 아니라 자민족도 희생됐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과거의 잘못을 꺼내야 하며, 누구 편이 잘했고 잘못한 것이 아닌, 인류 보편의 가치를 함께할 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아직 발굴하지 못한 유골들을 발굴하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필요성을 한·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다양한 시민들이 함께하도록 할 것이다. 우선 지난 18년간 주민과 유족,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자료집 등으로 역사에 남겨야 한다. 단순한 피상적인 우정 프로그램이 아니라 양 국의 시민들이 서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직시하며 넘어갈 수 있는 만남도 계획 중이다. 우리만 나서서 발굴을 지속적으로 해도 몇 구나 더 하겠나. 그보다는 이번 송환이 하나의 사례가 돼서 한·일의 다른 단체나 시민들이 더 나설 수 있게, 나아가 나라에서 전면적으로 할 수 있게 한다면 더 많은 분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희생자 115인의 유골이 20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서울시립묘지 납골당에 안장, 70년 만에 고국에서 영면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용준 기자 yjunsa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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