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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철딱서니 없는 병조판서와 국회의원
2013-09-06 10:53:28 2013-09-06 10:56:40
조선 세조 연간의 젊은 장수 남이는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1년 뒤에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른다. 27세의 나이로 국가의 무력을 총괄하는 국방장관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남이는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역모에 몰려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그가 죽은 나이도 27세였다. 젊디젊은 나이에 극과 극을 오갔던 비극적인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야사에 따르면 남이가 죽은 것은 자신이 지은 한시의 글자 한자 때문이라고 한다.
 
'대장부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후세의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라는 대목에서 평안하게 한다는 뜻의 평(平)자를 간신 유자광이 득(得)자로 바꾸어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란 뜻으로 만들고 이를 역모의 증거라며 예종에게 고변했다는 것이다.
 
남이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이 야사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실록 등 공식기록에 따르면 남이의 비극은 공직자로서의 무책임성과 자만, 그리고 이를 악용한 정치적 반대세력의 공작 탓이다.
 
남이는 세조 때 정권을 위협하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북방 여진족을 평정하는 등 20대에 '나라를 구한 공'을 세웠다.
 
세조의 신임은 물론이고 대중적 인기도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여기에 선왕 태종의 외증손이자 당대 권력가인 권람의 사위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유례가 없는 출세길을 내달렸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남이는 술에 만취한 채로 세조에게 대들기도 하는 등 몸가짐을 전혀 조심하지 않았다.
 
또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않으며 주변의 사람을 모으고 자신의 이해와 반대되는 사람이면 훈구세력이나 신흥 세력을 가리지 않고 비난을 일삼았다.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훈구대신들이 이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새롭게 주어진 고위관직에 수반되는 정치적 책임과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몸은 고위 공직자의 관복을 입었지만 정치력은 어리숙한데다 인격도 성숙되지 못한 어린 철부지였다.
 
나라의 주요 공직에 오르는 것은 그 공직에 따르는 책임도 같이 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책임은 자리가 높을 수록 더 무겁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이에게는 공직에 대한 성숙한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의 철부지 행동과 어설픈 권력욕은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빌미를 주어 그 자신은 물론 훈구파와 오랫동안 대립해온 신흥세력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된다.
 
사회적으로 전문성과 헌신성과 명망을 인정받아 주요 공직에 오르는 사례는 요즘에도 많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국회 비례대표다.
 
비례대표의 원래 의미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사회적 약자들에게 국가 정책결정에 참여할 문호를 열기 위한 것이다.
 
그 중에는 원래의 취지를 잘 살려 문화, 여성, 복지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공천권을 쥔 세력에게 잘보여 전혀 국회의원의 자질이 안되어 있는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석기 의원의 국회 비례대표 진출은 그런데 참 특이한 사례다. 그는 국회 입성 전에는 사회적 인지도가 제로에 가까웠다.
 
총선을 앞두고 주요 정당의 비례대표 명단이 발표되면 수긍이 되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석기 의원의 경우엔 수긍도 아니고 갸우뚱도 아닌 '이석기가 누구냐'였다.
 
이석기는 과거 전국연합의 지역 조직이었던 경기동부연합의 지도부 중 한사람이다. 전국연합 해산 뒤에도 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조직을 유지하며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크고 작은 진보정당들이 연대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자 여기에 이들이 조직적으로 입당하게 되고 결국 이석기 의원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에서 승리해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이 경선은 대리경선이니 부정선거니 하며 논란이 거셌던 바로 그 선거다.
 
지역구든 비례대표든 정당이 후보들을 공천할 때는 일정한 자격 심사를 거친다. 유권자들에게 내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당 차원에서 낮은 수준에서라도 일단 검증하는 것이다.
 
이석기 의원의 경우는 오로지 당원들의 투표에 의해서만 결정됐다. 특정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면 그 세력의 지도부나 지명자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당에 대한 기여도, 활동경력, 활동 성과 등을 따지지 않는 이러한 방식은 절차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후보에 대한 기초적인 검증이 부실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개선의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
 
어쨌든 이석기 의원은 재야조직의 지도부에서 일약 국회의원이 됐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라도 헌법에 지위와 역할이 규정되어 있는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인식하고 고위공직자로서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했다. 국회의원 이석기는 이제 경기동부 지도자가 아니고 헌법기관으로서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된 합정동 회의에서 그나 그의 지지자들이 했다는 발언을 보면 온통 함량미달의 대화들로 어이가 없는 지경이다. 그는 여전히 국민의 대표가 아닌 추종자들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석기 의원 문제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몸은 고위공직자의 옷을 입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만의 눈과 언어로 세상을 보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으로서 무거운 헌법적 책임감을 보여주지는 않고 공직에 진출했으면서도 소수 운동권만의 지도자에 머물러 있는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만 세상을 보는 배타적이고 좁은 시야, 이것이 그들을 노리는 세력에 빌미를 줬으며 유권자와 다수 국민들에게도 적대적 이질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뼛속까지 평화주의자라고 했지만 국회의원이 된 뒤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오히려 경선부정 논란에 이어 국기 의례 논란,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논란 등등 불필요한 논란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종북 국회의원이라는 의심에 확신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누가 낙인만 찍으면 종북 국회의원이 될 준비를 스스로가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남이의 역모 증거로 제시된 것은 그가 궁궐에서 숙직할때 마침 나타난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는 전언이었다. 이 한마디는 남이 등 신진세력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남이에게 역모의 의도는 없었다는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남이를 죽이기로 작정한 당시 왕과 훈구세력들은 증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철부지 남이의 면면을 익히 보아온 조정은 그 누구도 남이를 돕지 않았다.
 
남이는 어떻게 해도 죽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구조의 절반은 훈구파들이 만들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가 만들어온 것이다.
 
이석기 내란음모의 유일한 증거인 녹취록에는 부산에 가면 총을 구할 수 있다느니, 전화국이 주요한 공격대상이라느니 하는 어이없고 철딱서니없는 대화들이 가득하다. 북한과 연계할만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석기 의원은 지금 종북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그의 반대파들에겐 그가 진짜 종북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종북이 아니어도 할 수 없다. 종북은 당장에 가장 아프게 후려치기 좋은 곤장일 뿐이다.
 
국정원이 그렇게 몰아가고 언론도 광풍을 돕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의 절반은 이석기와 그 추종세력이 스스로 만들어 온 것이다.
 
이석기 사태의 후과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전체 민주진보세력이 함께 짊어져야 할 듯 하다.
 
당장 새누리당은 문재인 의원과 민주당에게 이석기 사태의 책임을 묻고 있고 이후 모든 선거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민주세력으로 가장한 종북세력' 논리를 대며 빨간 딱지를 여기저기 붙이고 다닐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수십년 정체시켰듯이 이석기도 한동안 민주주의를 지체시킬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과거의 기억에만 갇혀 있으면서 소통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통해서 목격했고 박근혜 현 대통령을 통해서도 목격하고 있다.
 
박정희를 통해서는 그 비참한 결말도 알고 있다. 지금은 이석기 사태를 통해 시대착오적인 낡은 변혁론도 커다란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역사의 한 순간이다.
 
'이명박근혜'가 저쪽의 극단에 서있다면 이석기는 이쪽의 극단에 서 있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고 나라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어느쪽에 서 있든지 마찬가지다.
 
이호석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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