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관종기자] "모처럼 일을 따와도 대금 받기가 힘들고 부당한 계약으로 손해만 보는데, 요즘 같아선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A업체 대표)
"10년을 벌어 한 2년 버틸 자금은 있어요. 일할수록 까먹어도 일단 입찰 참여는 해야지요. 실적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B업체 대표)
수주를 받으면 받을수록 손해를 보는 이상한 구조의 업종이 있다. 대부분 대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거나 하청 받은 업체로부터 재하청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는 전문건설업이 그렇다.
물론 국내 건설경기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대형 건설사들 역시 맥을 못 추고 있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문건설사들의 '먹고살기 힘들다'는 절규는 건설업 불황 이전부터 이미 귀가 닳도록 들려오던 목소리다.
대기업의 부당한 계약 요구와 대금 미지급, 추가비용 부담 등 갖가지 불합리와 이를 감시할 제도 부재는 중소건설 업계를 서서히 곪게 했다. 여기에 불황까지 겹쳐 공사 발주 자체가 크게 줄었으니, 전문건설업계의 한숨이 하늘이 무너질 정도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청업체 하나 휘청하면 수백개 업체 '와르르'
하도급에 의존하는 전문건설업체는 대형건설사와 종속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대형 건설사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업체 수가 부지기수다 보니 원청업체가 흔들리면 그 피해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구조다.
지난해 말 현재 100대 건설사 중 23개 업체가 법정관리 또는 워크아웃을 겪고 있다. 이들 업체로부터 하도급을 받은 중소형 건설사수는 무려 4062개사나 된다. 하도급 계약 액수만 11조3613억원에 이른다. 법정관리 신청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하도급업체는 2942개사로 집계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의 불공정 계약행위와 정부의 실적공사비 적용대상 확대, 최저가낙찰제 등 방침으로 전문업체의 고통이 이중삼중으로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건설인 7000여명이 지난해 11월22일 일산 킨텍스에서 생존권 궐기 대회를 개최한 것도 이런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다. 전문건설업계가 집단행동으로 목소리를 낸 것은 1975년 단종공사업 면허제도 시행이후 1985년 전문건설협회가 생긴 이래 처음이다.
이들은 대회에서 정치권과 정부의 부양책과 함께, ▲하도급 대금 우선 변제장치 마련 ▲외상 매출채권 담보대출 상환청구권 폐지 ▲표준품셈 현실화 ▲전문건설업체가 원도급을 받을 수 있는 소규모 공사 확대 ▲공정하고 투명한 하도급 입찰 시스템 도입 등을 요구했다.
대한전문건설협회 관계자는 "근로자의 직접고용 주체인 전문업체는 임금 및 장비대금 지급 등에 따른 원가 압박과 종합업체의 불공정 행위로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건설사 나몰라라..불공정 하도급 '여전'
중소 전문건설업체들이 겪고 있는 하도급 계약의 부당함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종합건설사는 공사 과정에서 추가공사 작업 지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 외 공사의 선 시공을 구두 지시한 후 계약서변경이나 작업지시서 교부를 꺼린다.
이는 공사 대금 미지급이나 감액으로 이어져 중소업체의 '울며 겨자 먹기 식' 적자 시공을 발생시킨다. 공식적인 문서가 없으니 대금을 못 받는다 한들 하소연 할 길조차 없다.
초저가 공사비용 유도와 표준하도급계약서 무시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일부 종합업체는 하도급자 선정을 위한 전자입찰 시 비공개 자체실행가격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유찰시킨 뒤 재입찰에 붙이거나, 네고를 통해 초저가 하도급 대금을 유도한다.
표준계약서 내용을 원사업자에게 유리하게 수정·변경해 사용하거나, 특약조건을 우선 적용토록 해 표준하도급계약서를 무력화하는 것도 문제다.
전문건설협회 조사 결과 2011년 상위 20대 종합업체 하도급계약 325건 중 86.5%인 281건이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수정·변경하거나 미사용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시공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부담 항목(민원처리비, 야간 작업비, 산재 처리비 등)을 현장설명서(견적특수조건 등)에 포괄적으로 명시해 추가 비용부담을 전가하기도 한다.
발주처에 통보한 하도급 산출내역서 항목과 실제 하도급 계약서에 첨부된 하도급 산출 내역서를 서로 다르게 작성하는 '이중 계약서'도 빈번하다.
업계 관계자는 "하도급사를 교묘히 이용해 회사의 자금난을 완화하려는 부도덕함이 종합건설업계에 팽배한 상황"이라며 "하소연 할 곳도 보상 받을 곳도 없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고 한탄했다.
◇외담대 발행은 '시한폭탄'
무엇보다 종합건설사의 B2B 전자어음(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 발행 남용은 하도급 업자들이 꼽는 최악의 애로 사항이다.
일명 '외담대'는 거래은행으로부터 외상매출채권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하도급업체가 공사 대금을 조기 회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최근에는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종합업체들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대출금 만기 상환을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피해는 대출금을 수령한 하도급 업체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외담대를 발행한 대형사는 부도처리는 되지 않고 연체에 따른 신용 불이익만 받는다. 하지만 대출금을 수령한 하도급업체는 원금에 이자까지 상환해야 하는 부담이 발생한다.
실제로 경영난을 겪고 있던 종합업체가 외담대 발행(4∼6개월)후 법정관리(워크아웃)를 신청하면서 하청업체가 피해를 본 사례가 많다. 지난해 8월 기준 177개 종합업체의 외담대 만기 미결제 규모는 약 2153억원에 달한다.
김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종합 건설사들의 불공정 계약을 막기 위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와 표준계약서 사용 확대 제도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문건설협회 관계자는 "원청업체가 외담대 발행 등 부당한 계약을 요구해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 같은 관행이 현실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동반 성장은 물론 전체 건설업계의 회생은 힘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하도급사들과의 계약 관계를 투명하게 유지하고, 표준계약서를 사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하지만 사업장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표준계약서작성 등 하도급업체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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