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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콤마'와 '피리오드' 사이, 근대의 머뭇거림을 담다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2012-12-13 14:22:56 2012-12-13 14:24:48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두산아트센터 레퍼토리로 공연 중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은 부담스럽지 않은 연극이다. 뚜렷한 메시지를 설파하는 대신 관객들로 하여금 구보 박태원의 동명 소설 속 '콤마(,)'와 '피리오드(.)' 사이에서 거닐도록 하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고 나면 마치 소설책 속에 잠시 들어가 구보와 함께 산책하다 나온 것 같은 묘한 인상을 받게 된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동명 소설 속 문장을 바탕으로 하는 이 공연은 그와 그가 살던 시대의 생각을 입체적으로 낭독한다. 행복을 찾는 소시민들의 고민이 193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시의 경성 풍경과 문단의 모던보이들은 초반에는 생경하지만 이내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
 
1934년 여름, 젊은 소설가 구보 박태원은 집을 나서 하루 종일 경성을 배회한다.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벗과 예술을 논하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풍물과 사람들을 기록하며 소설의 소재를 찾는다. 그런 박태원이 요새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작품은 자신의 일상을 담은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다. 연극에서는 박태원의 머리 속 생각과 소설 속 주인공 구보씨가 보내는 하루의 일상이 교차된다.
 
당시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 연출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예상과 달리, 무대 위에 펼쳐지는 것은 일제 치하에 놓인 우울한 도시 풍경이 아니다. 극중 인물들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근대적 도시의 세련됨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모던한 도시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환희,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식민지 현실의 좌절과 충격은 비록 무뎌지기는 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감각이다.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이들은 끊임없이 대사 중간중간 '콤마'와 '피리오드'를 연발하며 그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꼴라주 형식으로 쓰인 소설처럼 동명의 연극에서도 여러가지 상념과 풍경이 겹을 이룬다. 주인공인 구보 박태원 역할부터 겹을 이루는데 두 명의 배우가 '소설가 박태원'과 그의 자전적 소설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등장하는 동명의 인물 '구보'를 각각 맡는다. 두 배우 모두 몸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캐릭터를 구축하지만 소설 속 구보의 움직임을 좀더 과장되게 처리해 두 인물을 구분한다.
 
 
 
 
 
 
 
 
 
 
 
 
 
 
 
 
 
 
 
 
 
특히 극의 개념을 그대로 옮긴 디자이너 여신동의 무대가 단연 돋보인다. 무대는 반투명한 배경막을 활용해 세 개의 겹을 만들어낸다. 경성을 배회하는 구보를 따라 무대는 화신백화점과 전차의 안과 밖, 구보가 즐겨찾던 카페 '낙랑파라', 구보의 벗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 '제비' 등을 자연스레 넘나든다. 막간을 이용해 배경막에는 당시의 사료들을 영상으로 꼼꼼하게 인용하기도 한다. 이 작품으로 여신동은 2011년 동아연극상 '무대미술기술상'을 받기도 했다.
 
일제 경찰들의 경박함에 눈을 흘기면서도 인물들의 언어 속에는 일본어가 이미 녹아들었고 연애, 결혼 등에 대한 상념 속에도 근대적 풍습이 배어들었다. 그런 가운데 종로통, 동대문 어귀에서 구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처럼 공연은 시대적 경험을 부정하는 대신 여러가지 생각의 갈래를 펼쳐 놓으면서 삶에 대한 사색을 오직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원작 구보 박태원, 구성·연출 성기웅, 출연 이윤재, 오대석, 이화룡, 양동탁, 강정임, 박지환, 백종승, 전수지, 김하리, 드라마투르기 김옥란, 자문 박재영, 이연경, 기술감독 윤민철, 미술·무대 여신동, 조명 김형연, 영상 정병목, 일러스트 장준영, 의상 강기정, 소품 서지영, 분장 이지연, 움직임지도 이소영, 곽고은, 작곡·음악 변준섭, 음향 임서진, 12월3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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