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담보 대신 ‘현금흐름’으로 빌려주는 금융
2026-09-07 06:00:00 2026-09-07 06:00:00
최근 정부가 포용금융 활성화를 적극 표방하면서 정책보증과 채무조정 확대, 정책금융 연계 등 다양한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각종 금융,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하는 대안신용평가의 활성화는 정부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금융 사다리를 복원할 수 있는 생산적인 해법으로 주목받는다. 과거의 금융거래 이력에만 의존하는 기존 신용평가 시스템은 담보가 부족한 중·저신용자와 청년층을 제도권 금융에서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중금리 대출 시장의 공백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안신용평가에서 가장 유망하고 실효성이 높은 데이터 자원은 개인의 실시간 입출금과 결제 흐름을 포착하는 ‘현금흐름 데이터’다. 이는 단편적인 성실성만을 보여주는 통신료나 공과금 납부 이력과 달리, 총수입에서 정기 고정 지출과 소비를 차감해 매달 빚을 갚을 수 있는 ‘실질적 가용 소득’을 직접 도출해 낸다. 특히 자금 유입의 주기성과 규칙성, 지속성 같은 동태적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정태적 재무제표 상 저신용자로 분류되던 프리랜서나 소상공인의 우량한 상환 능력을 정교하게 선별해낼 수 있다. 결제망의 동태적 데이터를 결합해 부실 예측력을 높이면 금융회사는 자본 건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금융 이력이 부족한 씬파일러(thin-filer)에게 중금리 대출을 공급할 객관적 근거를 얻게 된다. 실시간 현금흐름 데이터는 담보 중심 금융을 정보 중심 금융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동력인 셈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현금흐름 언더라이팅(cash flow underwriting)’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널리 자리 잡고 있다. 전통적인 신용점수나 부동산 담보 대신 차입자의 실시간 계좌 거래 내역과 현금흐름을 정밀 분석해 대출 한도와 금리를 산정하는 방식이다. 담보가 없어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되었던 소상공인과 청년층이 자신의 실시간 경제활동 데이터를 입증 자료로 제시함으로써 정당한 금융 접근성을 보장받는 데이터 주권의 실천 사례라 할 수 있다.
 
현금흐름 언더라이팅에서 인공지능(AI)과 머신러닝은 단순한 보조 수단을 넘어 제도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엔진으로 작동한다. 현금흐름 심사는 계좌 입출금 적요, 카드 매출 주기, 고정 지출 등 방대한 비정형 시계열 데이터를 다루기 때문에 기존의 규칙 기반 모델이나 인간 심사역의 직관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XGBoost나 딥러닝 같은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수백 가지 결제 변수 간의 복잡한 비선형 관계를 학습함으로써 불규칙한 소득 흐름 속에서도 차입자의 소득 안정성과 상환 가능성을 정확하게 포착해 낼 수 있다.
 
신용점수가 낮아도 실제 돈을 잘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금융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미지=챗GPT)
 
이처럼 AI 기반 현금흐름 심사가 중·저신용자의 상환 능력을 정교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실증적 근거가 충분함에도, 우리 금융시장에서의 활용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는 기술의 결함이라기보다 시장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대형 시중은행들은 손쉬운 부동산 담보대출이나 고신용자 위주의 영업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거둘 수 있어,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AI 기반 대안신용평가 모델을 구축하고 중·저신용 시장을 개척할 유인이 크지 않다.
 
반면 중·저신용자를 주로 상대하는 저축은행, 캐피탈, 상호금융 등은 고도화된 AI 모델과 데이터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구축·운영할 여력이 부족하다. 결국 AI 기반 현금흐름 신용평가를 가장 필요로 하는 기관이 이를 가장 활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병목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공 애그리게이터(public aggregator)’의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Plaid, Yodlee 같은 민간 애그리게이터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 우선 공공 애그리게이터를 도입하고 이후 민간 회사의 진입을 유도하는 방안이다. 공공 애그리게이터는 현금흐름 등 대안신용정보 수집 및 AI 분석 기능을 금융기관에 제공함으로써 중금리 대출 시장 및 중저신용자 금융 공급 생태계를 실질적으로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