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의견 없습니다
나는 그 침묵을 정말 읽었을까
2026-08-06 14:50:58 2026-08-06 16:21:55
회의가 끝나갈 무렵이면 나는 늘 그 팀장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두곤 했다. 안건이 그의 팀과 얽혀 있는 날은 특히 그랬다. 무슨 말이든 나오기를 기대하며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개 짧은 한마디였다. "특별한 의견 없습니다." 그마저 없는 날도 있었다. 자기 순서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 서류에 눈을 둔 채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넘기곤 했다.
 
그는 공단에서 오래 일한 팀장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면 회의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필요하면 부딪치고, 적어도 자기 팀의 사정만큼은 앞장서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는 번번이 반걸음 물러서 있었다. 회의가 거듭될수록 내 안에서 같은 문장이 자라났다. '나는 이만큼 애쓰고 있는데, 왜 저 자리에서 저러고 있을까.'
 
나는 그 마음을 답답함이라고 불렀다. 조직을 걱정하는 마음, 일이 굴러가지 않는 데 대한 정당한 안타까움이라고 여겼다. 리더라면 응당 느껴야 할 감정이라고. 그러나 지금 정직하게 되짚어 보면, 그 답답함은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는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 감정의 크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의견 없습니다"라는 여섯 글자가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그 여섯 글자를 며칠씩 마음에 담고 곱씹었다. 회의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서도 그 장면이 불쑥불쑥 떠올랐고,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이렇게까지 걸린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화라기보다, 무언가에 정통으로 찔린 감각에 가까웠다. 상대가 한 행동에 비해 내 반응이 지나치게 컸다. 이럴 때는, 문제가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어딘가가 건드려진 것이다.
 
무엇이 건드려진 걸까. 방에 오래 앉아 있으니 부끄러운 답이 천천히 올라왔다. 나는 애써 일하는 나를 그가 알아봐주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의 침묵을 조직의 문제로 포장했지만, 정작 나를 움직인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서운함이었다. 답답함은 그 서운함이 쓰고 있던 점잖은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아래 더 깊은 곳에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그에게, 왜 회의에서 그렇게 말을 아끼느냐고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물어볼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려두고 있었다. '저 사람은 원래 소극적이야. 여긴 원래 이런 데야.' 그렇게 정해두었으니, 애초에 물음이 생겨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 서늘했던 것은, 내가 그 결론을 언제 내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작정하고 단정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렇게 되어 있었다. 몇 번의 회의, 몇 번의 짧은 대답이 침전물처럼 소리 없이 쌓여, 어느 순간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의 얼굴을 하고 내 안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침묵을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 침묵에 내가 뜻을 새겨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새긴 뜻을,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증거로 되읽고 있었다.
 
내가 뜻을 새기기 전의 침묵은 어떤 것이었을까. 뒤늦게 나는 그의 자리에 서서 헤아려보았다. 우리 공단은 이사장이 자주 바뀌는 곳이었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난 이들도 있었다. 직원들의 눈으로 보면, 새로 온 이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몇 년마다 다시 시작되는 셈이었다. 그때마다 조직의 방향은 새로 그려졌고, 어제까지 옳던 판단이 오늘은 아닌 것이 되기도 했다.
 
한번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같은 말이 누구 앞에서는 성실함이 되고 누구 앞에서는 주제넘은 나섬이 되었다. 말의 값이 사람과 때에 따라 그렇게 달라지는 자리에서는, 섣불리 의견을 얹는 일이 늘 안전한 것은 아니다. 오래 남아야 할 사람일수록 말을 아끼는 편이 덜 위험했다. 어떤 말이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그 팀장은 나보다 훨씬 오래, 훨씬 여러 번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러니 "의견 없습니다"는, 어쩌면 의견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상태였다. 이 방이 아직 말해도 되는 자리인지 가늠하고 있는, 오래 축적된 신중함. 나는 그 신중함을 미온적인 태도로 읽었다. 그가 물러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물러섬을 볼 줄 몰랐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를 움직였는지, 나는 다 알지 못한다. 내가 한 어떤 일도 있었을지 모르고, 나와는 무관한 그 자신의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의 변화가, 내 단정이 옳았음을 뒤늦게 증명해 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내가 읽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읽은 것이 처음부터 그가 아니었을 뿐이다.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 쓰고 나면, 다음 문장은 대개 정해져 있다. 그날 이후 나는 단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노라고, 먼저 묻는 리더가 되었노라고. 그렇게 쓰면 글은 매끄러워지고 나는 조금 나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단정한다. 회의 자리에서, 보고서를 넘기면서, 복도에서 스치는 짧은 표정 앞에서, 나는 여전히 어느덧 누군가를 다 읽어버린다. '저 사람은 원래.' '이건 뻔하지.' 그 문장들은 예전과 똑같은 속도로 떠오른다.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다. 이제는 그 문장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챈다. 그리고 알아챈 순간, 아주 잠깐 멈춰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이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오래전 내가 새겨 넣은 뜻을 다시 읽고 있을 뿐인가.'
 
그 물음이 매번 나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물어놓고도 끝내 같은 자리로 돌아설 때가 더 많다. 다만 이제 나는, 내가 본다고 믿는 얼굴이 그 사람의 것인지 내가 새겨 넣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 흔들림 하나가, 내가 얻은 전부다.
 
김주성 노원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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