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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바위그림)솔로베츠키 제도로 가는 길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17)
2024-03-25 06:00:00 2024-03-25 06:00:0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백해의 솔로베츠키 제도, 켐, 벨로모르스크 표시 사진=박성현
 
회색의 백해, 운하 건설 죄수들을 추모하다
 
향토역사박물관으로 돌아온 나는 퇴근하는 마리나 씨를 따라나섰다. 감사하게도, 숙소를 구하지 못한 내가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게 초대해 준 마리나 씨는 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백해로 향했다. 암각화가 있는 비그강만 보았지, 아직까지 백해를 보지 못한 나를 배려해 안내를 해주려 한 것이다. 이름대로라면 ‘하얀 바다’여야 하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백해는 회색으로 보인다. ‘백해’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16세기인데, 때로는 다른 이름들로 불리기도 했다. 백해라는 이름의 유래를 북극의 얼음과 눈이 반영하는 흰색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는 여러 설들 중 하나일 뿐이고 가장 단순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해양역사의 지명학이나 중세 러시아사의 기록, 또는 색에 대한 인식과 상징성(흰색은 밝고 신성한 이미지) 등 다른 근거를 토대로 한 다양한 설들이 있어 백해 명칭의 기원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한 상태다. 
 
벨로모르스크 주변 회색 백해의 모습. 해안 침식과 퇴적으로 인해 늪지대 유형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사진=박성현
 
마리나 씨를 따라 걷다 보니 바닷가에 덩그러니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운하 건설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십자가예요. 그들은 굴락의 죄수들이었지요.” 마리나 씨가 설명했다. 약자인 굴락(GULAG)을 풀어서 직역하면 ‘교정노동수용소본부’가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강제노동수용소로 알려져 있는 소련 시절의 산물이다. ‘굴락’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30년부터 1959년까지지만 그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20년 솔로베츠키섬에 세워진 최초의 강제노수용소부터라 할 수 있다. 이곳은 1923년부터 솔로베츠키 특수목적수용소(SLON)로 불리면서 북부지역 수용소 시스템의 중심이 된다. 굴락의 수감자들은 주로 정치범과 가벼운 잡범들로, 이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벌목, 광석 채굴, 수력 및 도로 건설 작업 등 각종 강제노동에 동원돼 소련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해-발트해 운하를 건설한 사람들도 바로 굴락의 죄수들이다.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 당시의 모습. 굴락의 죄수들이 건설 작업에 동원됐다. 사진=백해-발트해 운하 엽서 세트(모스크바: ОГИЗ, 1933)
 
백해-발트해 운하는 백해와 오네가호수를 연결하는 운하로, 길이는 일부 인공 수로를 포함해 총 227km이며 발트해와 볼가-발트해 수로로 이어진다. 1931년 말부터 1933년 8월 2일 공식 개통될 때까지 20개월 만에 완공됐다. 운하 건설에 참여한 죄수의 최대 인원은 1932년 말 10만 명을 넘어섰는데, 운하가 완공된 후에는 수만 명의 죄수들이 감형이나 조기 석방의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건설 기간 동안 12,318명의 죄수가 사망했다. 내가 본 십자가는 이 운하의 마지막 수문인 19번 갑문이 있는 곳이다. 나중에 향토역사박물관의 류드밀라 씨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백해-발트해 운하의 모든 갑문에는 운하 건설 중에 사망한 굴락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십자가가 인근의 마을주민들에 의해 세워지고 사제들에 의해 축성됐다고 한다. 완공 후 초기에 군사전략적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백해-발트해 운하는 수십 년간 활발히 화물 운송을 담당해 왔지만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1990년대 초반 이래 운송량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 당시의 모습. 굴락의 죄수들이 건설 작업에 동원됐다. 사진=백해-발트해 운하 엽서 세트(모스크바: ОГИЗ, 1933)
 
백해의 큰 섬으로 떠난 수도사들
 
벨로모르스크 시내를 걷다 보면 비그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조시마·사바티·헤르만 솔로베츠키교회라 불리는 정교회 건물이 있다. 이 교회는 2004~2005년경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솔로베츠키섬에 수도원을 세운 세 명의 성인 조시마, 사바티, 헤르만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현재의 교회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옛 소로카 마을(현 벨로모르스크)의 예배당이 있었다. 카렐리야인 출신인 수도사 헤르만은 비그강 기슭의 예배당 옆에 살았는데 1428년 포모르(바닷사람)와 함께 솔로베츠키섬을 방문했지만 혼자 섬에 살 수는 없어 소로카로 돌아온다. 한편,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 출신의 사바티는 완전한 고독과 침묵의 기도를 위한 장소를 찾던 중 백해 연안에서 이틀 동안 항해하면 무인도인 큰 섬이 있다는 말에 당시 머물고 있던 발람 수도원을 떠난다. 그는 먼저 소로카의 예배당 근처에 정착했고 숲속에 혼자 살던 헤르만과 알게 되어 1429년 함께 솔로베츠키섬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들은 현재의 수도원 위치에서 멀지 않은 호수 근처에 십자가를 세우고 수도실을 만들었다. 몇 년 후 헤르만이 보급품을 얻기 위해 섬을 떠나자 사바티는 홀로 남아 지내다가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고 1435년 소로카로 돌아와 세상을 떠난다.
 
2000년대 중반에 세워진 벨로모르스크의 조시마·사바티·헤르만 솔로베츠키교회는 옛 소로카 마을의 예배당이 있던 위치에 서 있다. 사진=박성현
 
사바티 사후인 1436년 조시마 수도사는 헤르만과 함께 솔로베츠키섬에 도착해 사바티의 수도원을 복원하고 이후 은둔자들이 모여들자 두 개의 목조 교회―그리스도변용성당과 성니콜라이교회―를 세우게 된다. 이 때문에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설립 시기를 1436년으로 간주하지만 설립자로는 세 수도사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사바티의 유해는 소로카의 비그강 강변에 묻혀 있다가 30년 후 조시마에 의해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소로카의 예배당과 사바티 성인의 무덤에 있던 십자가는 소련 시절 소실됐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는 교회가 예배당 자리에 새로 지어져 있다. 또한, 사바티와 헤르만이 1429년에 만났던 장소로 추정되는 소로카 마을 근처 비그강 하구에는 이들을 기리는 십자가가 1994년에 세워졌다.
 
1429년 사바티와 헤르만이 만났던 장소로 추정되는 소로카 마을 근처 비그강 하구에는 이들을 기리는 십자가가 1994년에 세워졌다. 멀리 왼쪽에 보이는 것은 조시마·사바티·헤르만 솔로베츠키교회. 사진=마리나 가브릴로바(M. Gavrilova, 벨로모르스크 향토역사박물관)
 
벨로모르스크를 떠나 솔로베츠키로 향하다 
 
솔로베츠키 제도의 방문은 다소 갑작스럽고 즉흥적인 결정이었는데, 수도원이나 굴락에 대한 역사 공부도 할 수 있지만 사실 주목적은 암각화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을 위해서였다. 다음 답사지인 콜라반도의 카노제로 암각화는 보호구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확한 체류 일자를 정하고 몇 달 전에 서류를 준비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앞의 일정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날짜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백해 암각화를 둘러본 후 가능하다면 신석기인들의 거주 흔적이 발굴된 주변의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을까 싶어 며칠 여유를 두었었다. 현장에 와 보니 당연한 일이지만 유적지는 발굴 후에 다시 흙으로 덮였고 유물은 박물관으로 옮겨진 지 오래라 흔적을 찾는 건 불가능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해 낸 계획이 돌로 이뤄진 고대의 미로와 예로부터 사미족이 숭배해 온 신성한 돌, 즉 ‘세이드’를 찾아보자는 거였다. 솔로베츠키 제도에는 바로 그 돌 미로가 존재한다!
 
백해 연안 포모르(바닷사람) 마을인 살나볼록에 있는 류드밀라 씨의 다차. 사진=박성현
 
향토역사박물관의 마리나씨 덕분에 하룻밤 잘 쉬고 다음날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전날 구멍 난 내 에어매트를 수리할 수 있을지 아들에게 물어보겠다고 가져갔던 류드밀라 씨는 구멍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인 걸 발견했다며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전해왔다. 새로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험지인 카노제로호수의 섬에서 야영하려면 에어 기능이 사라진 납작한 천이라도 바닥에 깔아야 할 것 같아 그냥 가져가기로 했다. 오전에 류드밀라 씨가 딸 마샤와 함께 내 에어매트를 가지고 왔다. 멀리서 온 이방인에게 마지막까지 친절을 베풀어 주는 박물관 분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류드밀라 씨는 우리를 그녀의 다차로 안내했다. 다차는 아주 소박한 러시아식 ‘별장’으로, 자그마한 통나무집과 텃밭으로 구성된 일종의 주말농장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다차는 백해 연안 포모르의 마을인 살나볼록에 있는데 이곳은 벨로모르스크 도시주거지에 속한다. 흥미롭게도 그 전날 보았던, 운하 건설 당시 희생된 굴락 죄수들을 위한 기념십자가의 근처다. 즉, 운하의 한쪽은 이 마을이고 다른 쪽은 19번 갑문이다. 이제 암각화의 선사시대와 운하의 역사를 품은 이 도시와도, 고마운 사람들과도 작별할 시간이다.
 
솔로베츠키행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선착장에 모여 있고 그 옆에는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온 상품’이라 쓰인 가게가 보인다. 사진=박성현
 
솔로베츠키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교외선 열차를 타고 켐으로 간 후 거기서 배를 타야 한다. 기차역까지 데려다 준 마리나씨의 배웅을 받으며 차창을 통해 감사와 아쉬움으로 손을 흔들었다. 1시간쯤 후 도착한 켐의 기차역은 한창 공사 중이다. 조금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여기서 포르트(항구)라 쓰인 1번 버스를 타고 부두가 있는 라보체오스트롭스크 마을에내리면 된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관광단지 프리찰(부두)’이라 쓰인 건물이 있는데, 여객선 승차권은 여기서 사게 돼 있다. 다시 한참 걸어 도착한 항구에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한쪽 옆에는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온 상품’이라 쓰인 가게가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제재 중일 텐데 물건을 떼 올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해선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이제 출발이다! 백해의 군도를 향해 가는 배 위로 갈매기들이 날아오른다.
 
솔로베츠키섬으로 갈 때 만나게 되는 백해.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성남 엔터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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