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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바위그림)잘라브루가의 걸작-스키를 탄 엘크사냥꾼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⑬)
2024-02-26 06:00:00 2024-02-26 09:32:1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스키 장면 
 
하얀 눈밭을 가르는 스키는 겨울스포츠의 꽃으로 불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부터 스키를 탔을까? 그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고고학 유물에 근거하면 석기 시대로 보인다. 1964년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약 1,200km 떨어진 코미공화국(현 러시아연방의 일부) 신도르(Sindor)호수 근처의 중석기시대 유적지(Vissky I) 이탄(泥炭)습지에서 소나무로 된 스키 파편이 발견됐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이것은 기원전 6,300년~5,000년경으로 추정돼 현재까지 발견된 스키 관련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스키의 한쪽 끝에는 엘크의 머리 모양이 조각돼 있는데, 이는 그들의 생존에 중요했던 동물에 대한 숭배와 주술적 또는 의례적 의미 외에도 설원의 오르막길을 오를 때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실용적 기능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엘크 머리 모양이 조각된 스키 파편.사진=코미공화국 국립박물관 소장품
 
약 8,000년 전 중석기시대의 스키 유물이 코미족의 조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 역시 사미족처럼 스키를 타고 사냥을 하던 북방의 선주민으로, 이들에게 스키는 이동수단이자 생활수단이었다. 스키를 탄 고대인들은 긴 겨울 동안 눈을 뚫고 식량을 구해야 했다. 앞서 언급한 이탄습지에서는 스키와 함께 사냥용 활과 간단한 썰매 유물도 함께 발견됐는데 그 주인들의 겨울 생활을 짐작케 한다. 스키, 사슴과 뗄 수 없는 관계인 북부 토착민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따른다. 고대 사미족의 전설에 의하면, 사슴은 원래 태양신에 속한 동물이었는데 태양신이 그 사슴을 사람들에게 주어 그 이후로 사미족과 사슴은 분리될 수 없는 사이가 됐다고 한다. 코미족 신화에 등장하는 사냥꾼 이르캅은 신도르호수 옆에서 물의 정령과 전투를 하는 숲의 정령을 보고 그를 도왔다. 숲의 주인은 이르캅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나무’를 찾으라고 말한다. 이르캅은 사냥꾼의 영혼이 담긴 그 나무를 발견해 매우 빠른 마법의 스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코미족 신화에 나오는 이르캅과 마법의 스키 그리고 푸른 사슴.그림=모셰프(A. V. Moshev).
 
그렇다면 스키를 타던 인류는 자신의 모습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남겼을까? 노르웨이의 암각화에도 스키를 탄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 중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스키 장면으로 백해의 잘라브루가 암각화를 꼽는다. 물론 그림으로 남은 기록이다. 참고로, 스키에 대한 최초의 문자 기록은 한나라(기원전 206년 또는 202년~서기 220년) 때 중국 북부에서의 스키에 대한 설명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번에 밝힌 것처럼, 잘라브루가는 발견된 순서에 따라 신(노바야)과 구(스타라야)로 구분돼 불리지만 제작 시기상으로는 신잘라브루가가 구잘라브루가보다 앞선 것으로 간주된다. 스키를 탄 사람들은 신·구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많이 등장하지만, 신잘라브루가가 좀 더 오래된 바위그림으로 추정되니 기록상으로도 먼저라 하겠다.
 
사미족의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스키를 타고 사냥하는 모습. 그림=1555년 로마에서 출판된 올라우스 마그누스(Olaus Magnus)의 책 '북유럽 민족의 역사'.
 
스키 탄 사냥꾼, 엘크를 쫓아 활강하다!
 
백해 암각화의 핵심인 잘라브루가의 원래 이름은 잘라브루다였지만 고고학자 라브도니카스에 의해 무슨 이유에선지 잘라브루가로 바뀌었다. 암각화군은 0.7헥타르의 면적에 걸쳐 있는데 국제 규격 축구장 크기다. 이중 구잘라브루가를 제외한 신잘라브루가의 경우 2007년에 발견된 새 그룹을 포함해 총 27개의 그룹으로 구성돼 있으며, 사냥과 노동, 충돌(전투), 일상과 의례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잘라브루가는 뛰어난 표현력과 기법으로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는 암각화군이다. 넓적하고 매끄러운 암석 표면에 새겨진 다중 형상은 하나의 전체적인 서사를 보여주듯 짜임새 있게 구성돼 있다. 바위들 사이사이로는 하천이 만든 우각호의 물이 괴어 있고 습지의 풀들이 자라나 배경화면을 이룬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4 안내판과 주변 풍경. 바위 사이 우각호와 습지가 보인다.사진=박성현
 
현재까지 스키 장면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각적 기록이자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바로 신잘라브루가의 그룹 4에 속하는 겨울사냥이다. 겨울사냥은 스키를 탄 세 명의 사냥꾼이 세 마리의 엘크를 추격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암각화의 창작자가 가진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기술은 바위의 경사면을 사용해 스키 트랙을 묘사한 데서도 드러난다. 오네가호수 암각화의 제작자가 그랬듯이 잘라브루가 암각화를 만든 선사예술가 역시 자연 지형과 바위의 미세 부조를 잘 활용하고 있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4의 겨울 엘크사냥. 스키를 탄 세 명의 사냥꾼이 각각 엘크를 쫓고 있다.사진=박성현
 
장면 속 사냥 현장인 언덕의 가장 높은 지점은 캔버스가 되는 바위 경사의 가장 높은 지점이다. 사냥꾼이 언덕 꼭대기, 즉 바위 경사의 가장자리 높은 지점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서 장면이 시작된다. 눈 위에는 엘크의 발자국과 스키폴 자국, 수직으로 미끄러져 내려와(실선) 멈췄다가 걷고(점선) 다시 미끄러져 가는 사냥꾼(왼쪽부터 첫 번째)의 동작이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다. 스키 트랙이 급격히 바뀐 곳에 엘크의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고, 활을 쏘려는 사냥꾼 앞에는 무리에서 뒤처진 엘크가 보이는데 이미 화살을 맞은 상태다. 두 번째 사냥꾼은 커다란 엘크에 창을 찔렀다. 그의 다른 손에는 사냥 장비의 일부로 보이는 로프 같은 것이 들려 있다. 세 번째 사냥꾼은 앞에 보이는 엘크에게 화살 세 대를 꽂았다. 
 
스키를 타고 엘크를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위의 넓고 경사진 공간에 높낮이와 회전을 포함하는 형태로 그려져 입체적인 운동감을 느끼게 해 준다. 사냥에 성공하는 세 스키어의 각자 다른 동작, 양감이 전해질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된 엘크, 쫓는 자들의 움직임과 속도, 흩어진 발자국에서 보이는 쫓기는 존재의 다급함, 그리고 양자 사이에 느껴지는 긴장감에 이르기까지 신석기 예술가는 그들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고도의 예술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4의 겨울 엘크사냥 야간 촬영 모습.사진=베르보프(А. Вербов, 2022년, 카렐리야공화국 국가자치기관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겨울 엘크사냥에서 여름 벨루가사냥으로
 
스키 탄 사람들의 겨울 엘크사냥 옆으로는 해양동물을 사냥하는 여러 배들이 등장하고 육지동물에 활을 쏘는 사람도 보이는데, 오른쪽 끝에 이르면 큰 배를 탄 열두 명의 사람이 벨루가를 잡는 여름철 사냥 현장이 나타난다. 엘크를 쫓는 스키어 사냥꾼들의 동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던 우리의 시선이 고래사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보트 위의 12인은 노를 젓고 작살을 던져 고래사냥을 하고 있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4의 여름 벨루가사냥. 12명이 탄 배의 첫 번째 사람이 고래에 작살을 던졌다.사진=박성현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웅덩이에서 진흙탕 물이 범람하고 손으로 문질러져 낮의 햇빛 아래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내를 해 준 향토박물관 교육연구사 마리나 씨와 나는 오랜 시간 잘라브루가에 머문 덕분에 해질녘의 광경을 포착할 수 있었다! 석양 무렵 자태를 드러낸 12인의 바다사냥꾼과 작살을 맞은 고래의 모습은 정교하고 섬세한 묘사로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밤에 경사 조명을 사용해 촬영된 야간사진에서는 인물들의 자태가 훨씬 입체적으로 두드러진다.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의 알렉세이 베르보프(A. Verbov) 씨가 찍은 야간사진을 보면 배에 탄 사람들의 키, 체격, 자세의 차이와 머리 장식, 노의 길이 등 세부적인 표현이 잘 드러난다. 그는 잘라브루가로 오는 숲길 나무에 일일이 표시를 해 관람객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이곳의 암각화를 알리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의 사진 작업도 그 일환이다.
 
석양에 비쳐 모습이 잘 드러난 신잘라브루가 그룹 4의 여름 벨루가사냥.사진=박성현
 
그림을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자. 뱃머리에는 엘크 또는 순록 머리가 장식돼 있다. 제일 앞에 탄 사람이 고래에 작살을 던져 맞췄다. 사냥은 절정에 이르렀다. 작살에 연결된 줄은 구불구불 접혀 있는 상태로, 작살이 이미 고래를 파고들었지만 줄을 늘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다급하고 긴장된 상황이다. 이제 바다사냥꾼들과 부상당한 고래의 한판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이 배의 위쪽에는 그보다 작은 배가 거꾸로 뒤집힌 채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작은 배의 뱃머리는 아래쪽 큰 배의 선미에 있는 한 사람과 연결돼 있어 서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위쪽 배가 거꾸로 뒤집혀 있고 배에 탄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사고를 당했음을 암시하거나 위험을 경계하기 위한 상징적 이미지일 수도 있겠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4의 여름 벨루가사냥 야간 촬영 모습.사진=베르보프(А. Вербов, 2022년, 카렐리야공화국 국가자치기관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성남 엔터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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