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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바위그림)포모르의 도시, 벨로모르스크의 역사와 삶의 풍경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16)
2024-03-18 06:00:00 2024-03-18 14:54:22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숙소 에피소드
 
비고스트로프 마을 야영장에 머물면서 이틀간 백해 암각화를 둘러본 후 나는 시내의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식별이 가능한 주요 암각화 이미지들은 거의 다 보았고 그 외의 지점에서 다른 그림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더 머무른다 해도 새로운 성과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명을 사용해 야외 암각화를 야간에 촬영했더라면 그림이 더 잘 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귀국 후에 들었지만, 당시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였고 숲속에서 혼자 밤을 새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야영장에 도착한 첫날부터 텐트 안에 깔던 에어매트에 문제가 생겨 추위에 떨며 자야 했던 터였다. 둘째 날엔 숙소 직원인 두 여성이 매트에 구멍이 난 것을 찾아내고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도와주려는 마음이 참 고맙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자주 오네요. 보통 여름엔 맑은 날씬데…” 숙소 직원이 담요를 빌려주며 말했다. 오네가호수 때부터 비가 따라다니는 듯하다. 
 
벨로모르스크 시내에서 바라본 비그강의 급류. 사진=박성현
 
다음날의 숙박을 위해 벨로모르스크에 도착한 날 묵었던 호스텔에 전화를 하니 방이 없다고 한다! 2~3일 후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미리 말해뒀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 없어 예약을 안 한 게 잘못이다. 이 시기가 한창 낚시 철이라 숙소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이런 문제는 이후 카노제로 암각화로 가기 위해 거쳐 간 백해의 다른 도시 칸달락샤에서도 계속 됐다. 백해 연안은 러시아의 낚시애호가들의 집결지였던 것이다. 비 내리는 밤 야영장에서 인터넷은 물론 안 되고 통화도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 결국 벨로모르스크 향토역사박물관의 마리나 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날 짐을 든 채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박물관을 관람한 후 다시 숙소를 고민해 볼 참이었다.
 
비그강의 급류와 낚시하는 사람들. 사진=박성현
 
향토역사박물관에서 만나는 벨로모르스크의 역사
 
벨로모르스크는 역사적으로 포모르(‘바닷가에 사는 사람’이란 뜻)의 정착지 중 하나다. 포모르는 백해와 바렌츠해(북극해 인근)에서 어업에 종사해 온 러시아어 사용 인구로 독자적인 민족지 집단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본 연재 9회 참고). 시내에 있는 향토역사박물관은 이러한 포모르의 삶이 녹아 있는 벨로모르스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박물관의 공식 명칭에 ‘백해 암각화’가 들어가 있지만 여기에서 암각화 관련 전시물을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암각화 지역의 전시관인 파빌리온을 이 박물관에서 관할하고 있다.
 
선박 건조 및 어업 활동에 관한 설명과 함께 포모르의 생활을 보여주는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사진=박성현
 
박물관에 도착하니 근무 중이던 큐레이터 이리나 씨와 도슨트 류드밀라 씨 그리고 나를 안내해 주었던 교육연구사 마리나 씨가 반겨준다. 협조 요청을 위해 연락을 주고받던 슈콥스키 관장은 휴가 중이어서 감사 인사를 직접 전하지 못했다. 박물관 안에는 백해 연안지방 포모르의 문화와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물품과 사진을 비롯해, 선박 건조와 항해 및 옛날 포모르 정착지에 관한 정보, 나아가 백해-발트해 운하의 건설과 도시 발전의 역사를 알려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도슨트 류드밀라 씨가 벨로모르스크 향토역사박물관을 찾은 어린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사진=박성현
 
벨로모르스크시의 옛 이름인 소로카 마을은 비그강 지류인 소로카강에서 따온 것으로, 이 포모르의 마을이 이웃에 있던 제재소노동자 마을, 기차역 마을, 해상운송노동자 마을과 합쳐져 1938년 벨로모르스크가 됐다. 통합된 마을들의 성격이 고스란히 벨로모르스크의 특징을 보여준다. 카렐리야는 숲이 많은 지역이어서 소로카에는 목재산업이 발달했다. 류드밀라 씨가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얘기해 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목재상인 미트로프 벨랴예프(1836-1903)는 소로카에 여러 제재소들을 설립해 운영했다고 한다. 자선가이자 음악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던 그는 백해 지역의 경제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를 기려 그의 사후 몇 년 뒤인 1909년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공장의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기념비를 세웠지요.” 박물관 한쪽에는 당시 세워졌던 그의 흉상 받침대의 명판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시기 레닌에게 헌정하는 기념비를 만들어야 했던 사람들이 새로 명판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그 뒷면을 사용했습니다.” 즉, 벨랴예프의 흉상은 레닌의 흉상으로 대체됐지만 그 받침대에 부착돼 있던 명판은 살아남아 한쪽에는 벨랴예프에 대한 감사가, 다른 쪽에는 레닌을 기리는 문구가 쓰여 동시에 전해지고 있으니 격동하던 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목재상인 벨랴에프 흉상 받침대의 명판(좌) 뒷면(우)에는 레닌을 기리는 문구가 나중에 쓰여졌다. 사진=박성현
 
향토역사박물관을 둘러본 후 박물관 분들과 암각화에 대해 잠시 담소를 나누는데, 이리나 씨가 내가 구하고 싶어 하던 책을 찾아와 선물로 준다. 아무 곳에서도 살 수 없어 반 년 전에 복사를 했던 책이라 고맙기 한량없다. 내가 인터넷을 통해 이리나 씨와 마리나 씨에게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를 보여주니, 고래사냥 그림이 많은 백해 암각화와의 유사성에 놀라워한다. 진지하게 살펴보고 토론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암각화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서 백해 암각화와의 유사성에 놀라워하는 향토역사박물관 큐레이터 이리나 씨와 교육연구사 마리나 씨. 사진=박성현
 
박물관을 떠나기 전 숙소를 알아보았지만 아주 비싼 호텔만 가능한 상황이라 난감해하는데 마리나 씨가 자신의 집에서 묵어가라 초대한다. 세상에! 벨로모르스크는 도착부터 떠날 때까지 친절한 도움의 연속이다. 민폐를 끼쳐 미안하지만 감사히 신세를 지기로 했다. 나는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로 하고 박물관을 나섰다. 내일은 떠나야 하니 벨로모르스크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시내 몇 곳을 더 둘러볼 생각이었다. 비그강의 넘실거리는 급류와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한참을 걸어가니 목적지에 당도했다. 바로 카렐리야전선박물관이다.
 
카렐리야전선박물관 입구. 사진=박성현
 
카렐리야전선박물관과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
 
카렐리야전선은 1941년 8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존재했는데, 이 박물관은 당시 전선의 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카렐리야전선은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제1차 전쟁(1939년 11월 30일~1940년 3월 13일, 일명 겨울전쟁)의 후속인 제2차 전쟁(1941년 6월 25일~1944년 9월 19일, 일명 계속전쟁)의 주요한 부분이다. 소련의 침공으로 발발한 제1차 전쟁으로 인해 동카리알라(카렐리야)를 잃은 핀란드는 2차 전쟁 때 나치 독일과 동맹해 소련을 공격하게 된다. 이 두 전쟁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이다.
 
카렐리야전선의 칸달락샤. 순록썰매는 후방으로 이동하는 정찰병을 위한 통신 및 탄약 공급 수단으로 사용됐다.  사진=무르만스크주 향토역사박물관 소장품
 
전선에서 이용하기 위해 기차에 순록을 싣는 모습. 사진=무르만스크주 향토역사박물관 소장품
 
카렐리야전선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으로, 전선에 활용된 순록수송부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전쟁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점은 소련군 스키부대에 콜라반도의 사미족을 비롯해 멀리서 온 네네츠, 코미, 한티, 만시족, 즉 토착소수종족들이 순록수송부대로 참여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징집된 이 순록유목민들은 수송뿐만 아니라 척후병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고 그들의 순록과 함께 북극전선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소연방 시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카렐리야전선박물관의 수많은 ‘영웅들’과 자료들 속에도 이 북부 토착민들의 순록스키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1945년 승전 퍼레이드에 나선 카렐리야전선의 대오에도 순록스키부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핀란드 점령 시기에 만들어졌던 카렐리야의 강제수용소의 사진. 사진=박성현
 
많은 전시물 중 핀란드 점령시기에 만들어졌던 강제수용소 사진이 눈길을 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과 여성들도 있다. 복도에는 카렐리야전선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3천 명 정도 전시돼 있는데, 노래 ‘백학’이 나오는 복도를 관람객이 걸어가면 백학의 이미지가 따라온다. 카렐리야전선의 총 사망자 수는 15만~25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핀란드인들은 또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핀란드 점령 시기에 만들어졌던 카렐리야의 강제수용소. 사진=박성현
 
박물관을 나오면서 앞쪽에 있는 공원에 들렀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 불린다―전선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하지만 러시아 도시 대부분에서 만날 수 있는 ‘영원의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류드밀라 씨에게 물어보니 불꽃이 꺼진 게 아니라 벨로모르스크에는 처음부터 ‘영원의 불꽃’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물론 희생자들의 이름은 쓰여 있어, 나는 ‘영원의 불꽃’이 있는 곳에 갈 때마다 하는 습관대로 박, 이, 김, 최 등 고려인의 성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벨로모르스크에도 있다! 이번엔 ‘박’씨 성이다. 아마도 카렐리야전선에서 사망했을 그는 어떤 사연을 품고 눈을 감아야 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는 벨로모르스크의 추모비 옆에 쓰인 이름들 중 고려인으로 추정되는 '박'씨 성이 보인다(가운데 맨 위).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성남 엔터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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