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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26)그날도 그랬을까?
2022-11-28 14:19:20 2022-11-28 14:19:20
그날도 그랬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그 기억이 몸에 각인된 것이다. 1975년 4월 26일이었다. 사이공을 에워싼 북베트남군 5개 군단, 17개 사단이 마지막 진격의 행진을 했다. 시민들은 진격하든 북베트남군 병사들에게 물도 건네주고, 반미(Banh My)도 건네주고, 바나나 잎으로 싼 찰밥도 건네주면서 박수를 치며 엄지 척을 해 보였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몸 어는 구석엔가 암호로 남아 있어 진격하는 것만 보면 사기를 북돋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줄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날도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 했을까? 그날도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을 것이다. 그날도 예쁜 야쿠르트 아줌마가 진격하는 군인들이게 야쿠르트를 건네줬을까? 아닐 것이다. 그때는 야쿠르트 아줌마는 없었을 테고, 거리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월드컵에서 손흥민이 골을 터트렸을 때 보다 더 큰 환호성을 터트리며 감격에 어린 가슴으로 옆에 사람이면 누구라도 껴안고 춤을 췄을 것이다.
 
축구 경기에서 베트남이 미국을 이긴 것이 아니다. 축구는 공정한 게임이다. 11명 대 명이 혹시 기울어진 운동장일까 봐 전후반 진영을 바꾸어서 한다. 그러니 가끔은 일본 대표팀이 독일도 꺾을 수가 있는 거다. 그러나 전쟁을 온갖 권모술수와 비열함이 다 내포되어있다. 미국이 2차 대전 때 쏟아 부은 폭탄이 300만 톤인데 베트남 전쟁 때 쓴 폭탄의 양은 이의 두 배나 되었다. 미국은 연평균 500억 달러를 퍼 부었다.
 
4월 30일 새벽 3시 45분, 마틴 미국 대사가 급하게 국기 게양대의 성조기를 내려서 대사관에 대기시켜 놓은 헬리콥터에 올라탄다. 그리고 아침 9시, 대사관의 주요시설을 파괴한 폭파반과 미 해병대의 경비 병력을 태운 마지막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고 날아오른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사이공 시가지에 시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무혈 입성하여 소련제 탱크가 대통령궁 담을 부수고 들어가기 불과 2시간 30분 전의 일이었다. 이로써 30년간에 걸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그것은 100여 년간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들(프랑스와 일본, 그리고 미국)과 피 튀기는 무장투쟁에서 베트남 민중이 거둔 커다란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억압받는 약소국가에 던진 희망의 찬가였다. 다음 날인 5월 1일, ‘사이공’시라는 도시 이름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지고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이끈 영웅의 이름을 딴 ‘호치민’시로 개명된다.
 
반공주의자 응오딘 지엠이 미국의 간택을 받아 남베트남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진행된 일은 제네바 평화협정을 파기하는 행위였다. 응오딘 지엠 정권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지원 아래 남북 총선거를 무산시켰다. 응오딘 지엠은 친위 체제를 구축했고, 그의 동생 응오딘 뉴는 비밀경찰 총수가 되어 공포정치를 했다. 국가관직에는 친인척과 가톨릭 관련자들만 넣었으니 이것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응오딘 지엠은 공산주의의 '공'자만 들어가도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학살하였다. 그는 독재정치와 학살로 집권 초기에 12,000명이 처형당했고, 1955~1958년까지 4만 명을 감옥에 보냈다. 이승만 못지않은 악랄한 독재자이자 반공주의자였다. 게다가 천주교 신자였던 지엠 정권은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63년 5월 8일 석가탄신일 후에 지역에서 승려들의 평화적인 종교행사 도중 경찰들이 강경한 진압을 시작했다. 6월 11일 지엠의 불교 탄압을 반대하는 시위 과정에서 틱꽝득 승려가 종교적 평등과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항의 표시로 소신공양으로 독재정권과 그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에 항의하였다. 틱광득 스님은 사이공 한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두 스님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틱광득 스님은 고통 속에서 평온하게 불꽃이 되어갔다.
 
이 장면은 기자들의 보도로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보도가 되면서 전 세계를 경알하게 하고 응오딘 지엠은 국제적 지탄을 받으며 응오딘 지엠 정권은 약화되기 시작하고 남베트남의 반정부 세력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을 결성해 응오딘 지엠 정권과 싸웠다. 이들이 바로 북베트남 정규군과 구별되는 베트남 코뮤니스트, 즉 베트콩이었다. 결국 지엠 정권은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무너졌다. 케네디 정부와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지엠을 지지할 수가 없었다.
 
응오딘 지엠은 비밀 통로를 통해서 차이나타운으로 도망을 쳤지만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전화를 걸어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베트남 공화국 초대 대통령 응오딘 지엠은 악명 높은 비밀경찰 수장이자 자신의 친동생 응오딘 누와 함께 처형당했다.
 
1968년 1월 31일 자정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들은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 인민군(월맹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합동 대공세를 펼쳤다. 이른바 구정대공세였다. 구정(설날)은 음력을 쓰는 나라는 모두 중요한 명절이다. 베트남도 우리나라처럼  음력으로 설날을 쇠었기 때문에 설날에는 남북 베트남 모두 휴전에 들어가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 기간에는 미군도 핑계 김에 연휴를 즐기기 위해 긴장이 풀어져 있었고, 게다가 설날에는 귀성인파와 차량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검문도 어려웠다. 베트콩은 이를 이용해  무기는 관 속에 넣어서 들어오는 등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100대 도시를 포함한 주요 시설을 빠른 시간 내에 점령하였다. 구정 공세 당시 사이공의 미 대사관이 공병과 자살특공대에게 점령당하고, 1달 동안 미군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응우웬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는 한때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미군의 포격으로 도시 전체의 80%가 폐허로 만들어버리고야 후에를 탈환할 수 있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군사적으로는 타격을 심하게 보았고 결국 패배한 전투였으나 전략적 승리를 얻었다.
 
북베트남은 지속적인 패배를 통해 여론전에서 승리했다. 이 때문에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승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반전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68년 5월 10일 반전 여론에 밀린 미국 정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을 상대로 평화회담을 시작했다.
 
파리평화협정은 1969년 8월 닉슨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 툭 토와 단독 비밀회담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는 발표를 하였고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에 조인하면서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미국의 이름으로 세계 평화를 주관해야한다는 워싱턴의 오만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복병을 만나 호되게 혼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오지랖을 떨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왜 알 수 없는 전쟁은 지금도 계속대고 있을까?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56일차인 지난 25일 베트남의 한 거리에서 만난 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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