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경제의 생존과 직결된 필수 과제다. 정부는 2025년 8월 발표한 새 정부 국정과제 40번 '지속가능 미래를 위한 탄소중립 실현'에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40% 감축한다는 목표를 담았다. 이후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도 '2018년 순배출량 대비 53~61% 감축'으로 설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산업계의 탈탄소 전환과 기후 신산업 육성을 추진하며 2050년 탄소중립(Net-Zero) 실현을 향한 로드맵을 구체화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올해 6월 발표할 예정이었던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지난 10월7일에야 늑장 발표했다. K-GX 전략은 비전과 목표, 3대 추진방향, 9대 정책과제로 구성돼 있다. 2035년까지 정부 재정 200조원과 전환금융·녹색금융을 포함한 기후금융 790조원 이상을 합쳐 1000조원 이상을 투입하고, 별도로 'K-GX 시그니처 프로젝트'에 민간 220조원을 투자한다는 구상이다. 기후금융 공급에는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 등 5대 정책금융기관이 핵심 역할을 맡는다.
정책금융과 관련해 눈여겨볼 대목은 '지속가능한 K-GX’의 8번째 정책과제인 ‘민간투자 생태계 조성'이다. 정부는 이 과제에서 대규모 기후금융 공급과 전환금융 도입, 녹색금융 지원 강화를 거듭 강조했다. 특히 전환금융을 본격 가동하기 위해 2026년 10월까지 전환금융 모범규준 최종안을 마련하겠다고 명시했다.
정부가 전환금융의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대규모 자금 공급까지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를 뒷받침해야 할 금융 현장에서는 제도적 '엇박자'가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민간 금융회사에 탄소감축·해외 감축사업에 대한 자금 공급 확대를 주문하고 있지만, 관련 자산에 적용되는 자본규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정책이 전환금융의 문을 열었지만 현장의 규제는 여전히 높은 문턱을 세워둔 셈이다.
K-GX 띄웠지만…금융규제는 여전히 제자리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다배출·난감축 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는 기존 녹색금융만으로 산업 전환 자금을 충당하기 어렵다. 전환금융은 이미 친환경으로 인정받은 사업을 지원하는 녹색금융과 달리,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이 저탄소 산업으로 바뀌는 '과정'에 자금을 공급한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국내 탄소중립 투자 수요는 연평균 57~82조원으로 추정되는 반면 녹색금융 규모는 2020년 기준 31조원 수준이다.
문제는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과 금융회사의 자본규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융기관이 탄소배출권을 보유하면 가격 변동에 따른 손실 가능성이 자본규제에 반영된다. 이를 계산하는 기준인 '시장위험가중자산(RWA)'은 위험값이 높을수록 금융회사의 자본부담도 커지는데, 현재 탄소배출권에는 60%가 적용된다.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부담을 낮추기 위해 순자본비율(NCR) 산정 때 적용하는 탄소배출권 위험값을 32%에서 18%로 낮췄다. 그러나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가 보유한 탄소배출권은 지주 전체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산정할 때 시장위험가중자산에 다시 반영된다. 개별 증권사의 규제 부담은 낮췄지만 금융지주 차원의 자본부담은 남아 있는 셈이다.
탄소배출권, 석탄보다 위험한 자산인가
탄소배출권은 일반적인 원자재와 성격이 다르다. 정부가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을 위해 제도적으로 발행·관리하고, 배출권거래제 대상 기업은 실제 배출량에 맞춰 배출권을 제출해야 한다. 정부가 공급량을 조절하거나 가격 급등락에 대응할 수 있는 시장안정화 장치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탄소배출권은 전력·탄소거래 자산으로 분류돼 60%의 위험값을 적용받는다. 석탄·목재에 적용되는 30%의 두 배이며 원유·일부 농산물의 35%보다도 높다. 국가가 공급량과 시장안정 장치까지 관리하는 탄소배출권을 석탄이나 원유보다 더 위험하게 평가하는 것이 적정한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도 전환금융을 별도의 금융영역으로 정비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2021년 '기후전환금융 기본지침'을 마련한 뒤 지난해 3월 기업의 전환전략과 투자계획, 공급망 배출량, 업종별 감축경로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영하도록 기준을 보완했다.
유럽연합(EU)도 녹색분류체계를 유연하게 적용하고 민관협력금융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하고 있다. 국제스왑파생상품협회(ISDA) 역시 2021년 EU 배출권시장의 변동성을 분석해 탄소배출권 위험값을 60%에서 37% 수준으로 낮출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해외 감축실적 확보에도 자본규제 '벽'
2035 NDC 달성을 위해서는 국내 감축뿐 아니라 해외에서 확보한 국제감축실적(ITMO)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ITMO는 해외에서 줄인 온실가스 감축분을 국가 간 합의를 거쳐 우리나라의 감축실적으로 인정받아 사용하는 제도다.
해외 감축실적은 사업이 끝난 뒤 사올 수도 있지만, 금융기관이 사업 초기에 투자해 향후 발생할 감축실적을 미리 확보할 수도 있다. 문제는 ITMO의 자산분류와 위험값 적용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가 민간 금융기관의 해외 감축사업 선투자를 독려하면서도 자산분류와 자본규제 기준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둔다면 정책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전환금융의 마지막 퍼즐…'규제와 집행'
해법은 규제를 무조건 낮추는 것이 아니다. 탄소배출권과 국제감축실적에 대한 자본규제를 실제 위험에 맞게 정교화하고, 정책금융의 평가·지원체계도 전환금융 확대라는 정책 목표와 맞추는 것이다.
첫째, 탄소배출권의 제도적 특성을 반영한 별도의 위험값 적용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 별표 3의2 등 관련 규정을 손질해 실제 가격변동성과 유동성, 정부의 시장안정화 장치 등을 반영하고 현행 60%를 30~35% 수준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둘째, 해외 감축실적도 실제 위험에 따라 차등 규율할 필요가 있다. 사업 진행 단계, 감축실적의 발급·국제이전 여부, 국가 NDC 활용 승인과 '상응조정', 정부·공공기관의 구매약정이나 보증 등을 위험값에 반영하는 방식이다.
셋째, 2027년부터 정책금융기관의 KPI와 경영평가에 전환금융 공급과 민간자본 유인 성과를 반영해 정책 방향과 현장 집행을 맞출 필요가 있다. 기후대응기금과 이차보전 등 기존 금융지원에도 '전환' 요소를 확대해 정책금융이 먼저 길을 내고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탄소배출권과 국제감축실적에 대한 자본규제 개선은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다. 1000조원 K-GX를 선언에서 실제 투자로 연결하는 '전환금융의 마중물'이다. 탄소중립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책 방향과 자본규제, 정책금융의 집행체계가 함께 움직여야 할 것이다.
정재호 뉴스토마토 고문·K-정책금융연구소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