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1947년생 올해 75세인 윤여정은 여전히 ‘젊음’을 유지했다. 그의 ‘젊음’이란 이런 것 같았다. 인터뷰에서 그는 나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물론 나이를 내세우긴 했다. 애플TV+ ‘파친코’ 첫 캐스팅 관련 미팅을 앞두고 ‘오디션을 보자’란 말에 기겁을 했단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50년이 넘는 연기 경력을 무시하고 ‘오디션’을 보자는 것은 분명 무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화 차이였다. 윤여정도 이를 알고 웃으며 얘기를 했다. 나이를 내세우지만 나이를 우선시하는 고리타분한 꼰대는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작년 ‘오스카 수상’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얘기를 한다. 통상적인 젊은 시절 그 상을 탔다면 정말 즐거웠을 것이란다. 하지만 70대가 넘어 그 상을 탔기에 더 다행이라고 한다. 기쁨과 현실 그리고 일상의 경계를 구분할 줄 아는 연륜이랄까. 농담이겠지만 영화 ‘미나리’에 함께 출연한 스티븐 연에게 ‘작년에 오스카 남우주연상 안 받은 게 정말 다행이다’고 인사를 했다며 웃는다. 윤여정이기에 가능한 조언일 것이고, 그래서 스티븐 연도 기분 나쁜 조언이 아닌 진심으로 그의 의도를 받아 들였단다. ‘파친코’ 공개를 앞두고 만난 윤여정과의 대화에서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소개한다.
배우 윤여정. 사진=애플TV+
이날 윤여정은 극중 자신의 손자인 ‘솔로몬’역을 연기한 한국계 배우 진하와 함께 카메라 앞에 앉았다. 이날 진하는 계속 윤여정에게 ‘마스터’란 호칭을 썼다. 그 속 뜻한 분명 ‘오스카 위너’(수상자)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미국인에게 ‘오스카’는 분명 다른 세상이고 다른 경지다. 한국계 미국인인 진하 역시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윤여정은 이날 문자 그대로 ‘질색’을 하면서 말했다.
“제발 나한테 그 호칭 쓰지 말아줘. 주변에서 오스카 수상하고 달라진 게 뭐가 있냐고 하는데 달라질 게 뭐가 있어요. 하나도 달라진 거 없어요(웃음). 아카데미인지 뭔지 그게 뭐 대단하다고. 사실 상 받고선 좋았지. 그럼 당연히 좋죠. 근데 딱 그날뿐이에요. 지금은 그때랑 똑 같은 사람 만나고 똑같이 놀고 그래요. 똑 같은 집에서 살고. 내 나이에 정말 감사한 일인데 그렇다고 그 상이 날 변화시키진 못해요. 30대나 40대에 받았으면 내가 둥둥 떠다녔을 거에요. 그런데 이 나이에 받아서 이렇게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난 나로 살다가 죽을 거에요(웃음)”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자이니치’다.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 이민자 가족에 대한 일대기를 그린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시작해 최근까지의 얘기를 담고 있다. ‘자이니치’는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을 일컫는 말이다.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이지만 ‘파친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윤여정은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며 설명했다. 새겨 들어봐야 할 지점이었다.
사진=애플TV+
“이 나이가 되도 역사는 배우는 게 좋아요. 나도 몰랐어요. 자이니치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독립을 하자마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붕 뜬 사람들이 됐잖아요. 고국이 남북으로 나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총련을 ‘친북’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조총련 학교에 들어가야 했을 뿐 이념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 분들에게 ‘자이니치’는 엄청난 자부심인 거죠.”
그는 이날 함께 등장한 한국계 미국 배우 진하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전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평소 거침 없기로 유명한 그의 언변은 진하를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거침없는 언변 속에도 아들 나이보다도 어린 까마득한 후배 배우에 대한 진정 어린 관심과 사랑이 짙게 베어 있었다. 그는 진하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하 역시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그 의미를 알아 들었다.
“촬영장에 갔었죠. 첫 촬영이 기자역에서 찍는 장면인데, 함께 하는 남자 배우가 누군가 했었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한국에선 남자 배우라고 하면 ‘이민호’처럼 키크고 핸썸한 느낌을 상상하잖아요. 난 늙었고 편견도 있고(웃음). 근데 지금 옆에 앉아 있지만 이렇게 조그맣고 까만 애가 있는 거에요. 애플이 몇 달 동안 오디션을 봐서 뽑은 배우가 쟤라고? 정말 놀랐어요(웃음). 사실 너무 어이 없었지. 근데 첫 촬영하고 나서 내가 스태프들에게 그랬어요. ‘쟤 잘한다. 진짜 잘한다’라고.”
'파친코' 스틸. 사진=애플TV+
이번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다. 윤여정이 ‘미나리’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기 이전부터 촬영을 하던 작품이다. 그리고 극중 ‘파친코’에선 초기 한국 이민사에 대한 얘기도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시선이 주목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윤여정은 1070년대 미국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거주했었다. 당시에는 국내 활동 없이 오롯이 ‘윤여정’으로 그 동네에서 살았었다고.
“난 1970년대 살았고, 그 당시 굉장히 작은 동네에서 살았어요. 우선 난 그때도 인종차별은 거의 못 느꼈어요. 우선 내가 영어를 못하니 미국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근데 지금 진하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을 보니 꽤 많이 그런 걸 당하고 사는 것 같더라고요. 그들을 보면 뭐랄까. ‘국제고아’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데 그렇다고 미국인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미나리’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정이삭 감독을 진짜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런 느낌이 또 그렇게 연결도 되는 것 같네요(웃음)”
어떻게 보면 정말 묘하게 닮아 있기도 했을 듯하다. 그래서 제작진은 ‘미나리’로 윤여정이 ‘오스카 수상’을 하기 이전부터 ‘선자’역에 낙점하고 그를 캐스팅하려 노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엄마’란 단어는 윤여정과 선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1970년대 어린 아들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던 윤여정이 50년 뒤 미국에서 ‘오스카 수상자’가 됐고 그 무대에 올라 ‘엄마가 이 상을 받았다’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모습이 여전히 선하다.
사진=애플TV+
“선자는 굉장히 강인한 여성이죠. 우리 엄마들이 다 그렇잖아요. 내가 나이를 들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인생은 다 선택이란 걸. ‘선자’도 누구와 연애했고 결혼했고. 다 그의 선택이잖아요. 그 선택이 만든 생존 욕구. 어쩌면 그게 나와 닮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극중 한 남자의 제안에 선자는 거부하잖아요. 나라면 그랬을 수 있을까 싶어요. 100년 전쯤 살던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라면? 못 그랬을 것 같아요. 지금도 그건 참 부러워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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